정신 차려 보니 내가 팀플 빌런이 돼있었습니다

간단하게 빌런을 없애는 방법

by 빅아지

나는 남한테 싫은 소리를 잘 못한다. 누군가 자기 생각을 말하거나 자신이 조사한 것을 내어올 때, '그건 ~~해서 좀 그렇지 않아?'라는 식의 최소한의 비판도 거의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들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좀 힘들다.


근데 사실 내가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못하는) 이유는 내가 그 소리를 듣는 게 싫어서다. 굳이 싫은 소리를 해도 돌리고 돌려서 결국은 뭘 말하고 싶은지 모호해질 때까지 돌려서 말하는 내게, 남들도 그렇게 얘기해줬으면 싶다. 그렇다고 비판을 들으면 뒤끝 있게 기억하고 그런 건 전혀 아닌데, 그 비판이 쌓인 말투가 '싫은 소리'로 다가오는 순간 확 마음이 상한다. (역시 말투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존중하고 존중받는 게 중요했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요지가 지적이어도 말투에서 존중이 느껴지면 더 귀 기울여 듣게 된다. 사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인간의 욕망은 존중받고 인정받는 거라는데, 존중이 느껴지는 말투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법이다.


그래서 솔직히 진짜 노력한다. 최대한 진심을 담아 리액션을 하고, 나에게 기분 좋은 건 남의 기분도 좋게 할 테니까 진짜 많이 생각하고 행동하려 한다. 근데 가끔, 어떤 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의문이 스멀스멀 들게 만든다. 아무리 존중해줘 봤자 돌아오는 건 같은 존중이 아닌 무시인 경우가 너무 많았다. 호의를 계속 주면 호구인 줄 아는 건가?


요즘은 남 눈치 안 보고 싫은 소리 하는 사람들한테 똑같이 말해버릴까 하다가 (어차피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그런 소리 듣는 게 상관없기 때문 아닌가??) 그런 말을 하려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짜증이 나서 멈췄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결국 나는 오늘도 그렇게 호구가 됐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지 않을까? 칭찬을 해주면 나보다 자기가 더 잘난 줄 알고 가르치려 든다던지. '제시하신 아이디어 너무 좋네요~'하고 이어 내 아이디어를 말하면 '정말 좋네요~'하고 지적하면 모를까. 기세 등등해진 모습으로 '근데 00씨가 제시하신 건 ~ 부분이 좀 그렇네요'라고 하는. 나는 뭐 너 의견이 완전 좋아서 저렇게 한 줄 아나. 근데 뭐 어쩌겠나, 자기 객관화 안 되는 사람들한테는 너 의견 별로라고 말해봤자 무시당하는 걸 경험상 뻔히 아니까 그냥 '그러게요 그럴 수 있겠네요~'하고 넘어가는 거지.


그렇게 집단에 대한 애정이 떨어진다. 그 사람과 같이 속한 그 집단에서 내 위치가 사라지기 시작할 때쯤, 그냥 내가 애정을 주지 않는 걸 선택하는 거다. 한발 뒤로 물러나서 관조하기 시작하고 이제는 칭찬도 의견 제시도 하지 않는 그 상황에서 부유하다가 조용히 빠져나오는 것.


이럴 때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가 떠오른다. 내가 리더를 맡았으면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면서 남들을 밀어내지는 않을 텐데.


솔직히 어느 정도 목적이 맞는 사람들끼리 구성한 모임에서는, 모두가 판을 깔아주면 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변할 수도 있고, 다들 자신만의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소극적이고 1인분만 하고 빠지려는 리더 눈에는 '열심히 안 하는 사람들'로 변하는 건, 그 조직의 분위기와 그 분위기를 만든 리더들과 소위 목소리 큰 몇 명의 책임이다.


얼마 전 어떤 팀플에서, 그걸 진짜 크게 느꼈다. 한 사람이 주도해서 밀고 나가는데 분명 초반에는 마이크를 켜고 열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이번에는 제가 할게요!' 하던 사람들은, 이젠 캠도 켜지 않고 마이크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도 않게 됐다. 분명 판을 깔아주면 그만큼 열정적일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은 방조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자료조사 등의 파트에서 1인분 정도는 여전히 성실하게 하는 듯했지만, 그 이상의 창의력이 돋보이거나 훌륭한 수준의 결과물이 나올리는 만무했다.


누군들 인정받는 걸 싫어하겠는가. 근데, 그런 모든 구성원들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는 리더는 그 욕망을 잠시 감춰야 한다. 자기가 튀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남들에게 발언권을 한번 더 주고. 그 의견이 좋다 말하며 더 많은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고, 그렇게 모두가 편안하게 '나설 수 있는 판'이 깔려있는 곳에서 마음껏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조직에 애정을 갖게 된다. 시키지 않아도, 불러다가 왜 그렇게 참여를 하지 않냐고 눈치를 주지 않아도 알아서 열정적으로 한다. 그게 사람 심리다.


그렇다면 리더에게만 책임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누구든 '목소리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리더는 아니지만 주변에서 그 비슷한 포지션에서 분위기를 주도해 나가는 사람은 어디에서나 있다. 본인이 그런 사람인 경우가 많다면, 제발 그 이상으로 나서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본인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면 그건 진짜 '착각'이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나서서 일을 하고 제가 이것도 할게요~ 저것도 할게요~ 하면서(나중에 떠맡는 게 아니라 본인이 자진해서..) 나중에 가서 독박 썼다는 식으로, 팀원에게 너가 참여 안 해서 내가 다 하고 있잖아 식의 소위 피해자를 도맡으려 한다면 그건 그냥 본인 업보인 거다. 남들이 할 수 있는 걸 뺏어다 했으면 적어도 면전에서 안쓰러운 척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특히 1인분 정도는 하는 다른 팀원 앞에서. 누구든 남들에게 '내 덕분이야'라고 내세우고 싶은 생각이 없을까. 본인이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빌드업을 해왔다는 그 얄팍한 전략을 사실 모두가 알고 있다.




쏟아지는 팀플들 속, 어떤 하나의 팀플에서 정말 할 일이 많았다. 써야 하는 보고서 양도 30장이 넘었고, 그 보고서를 위해 몇 시간은 더 투자해서 토론을 준비하고 말을 맞춰 토론까지 했어야 했다. 무임승차가 많이 발생하는 팀플이라는 악명을 많이 들어왔어서 약간 걱정도 됐다. 그런데 처음에 다 같이 역할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화를 해나가는 동안, (초반의 대부분의 팀플 분위기에서처럼) 다들 정말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조장을 뽑고 이후 활동을 진행해 나가면서 조장은 팀원들의 자료 제출 기한을 관리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으며 동시에 모든 팀원에게 발언권을 주고자 노력했고, 그 방식이 소위 '스파르타'식이긴 했지만, 그런 전략은 스트레스보다는 '판 깔아주기'에 가까웠다. 판이 깔려 있으니 모두가 열심히 할 수밖에.


'판 깔아주기'가 핵심이다. 솔직히 아무리 자기가 내향적이라고 해도,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경청해 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면 용기를 내어 말을 시작하고,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애초에 열정이 있던 사람이라면 판을 깔아줬을 때 그 누구보다 도움이 되는 팀원으로 변할 거다. '아닌데요, 정말 다들 처음부터 안 하려고만 하던 빌런들이었는데요' 라며 믿지 못하겠다면 딱히 뭐라 할 말은 없지만(그렇다 나는 애초에 자기주장이 너무 확실한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정말 사실이다.


따라서 판을 깔아준다는 건, '내가 너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에 틀림없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과 동시에 '당신의 소중한 의견을 들려주세요'와 같은 태도가 포함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존중이 가미된 발언권 주기. 너무도 간단한데 이 간단한 상황을 형성하는 리더는 많지 않다. 자기 얘기하기 바쁠 뿐.


처음에 리더가 돌아가면서 발언권을 갖고 이야기를 나눠 보자 라고 말을 한 다음, 한 명씩 돌아가면서 부담 없는 간단한 의견 제시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정말 말하기 어려워하는 사람, 알고 보니 말하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 판을 깔아주니 아예 열정적으로 태도가 확 변하는 사람 등 각자의 특징을 기억해 놓는다. 그리고 또 다른 사안에 대한 토의 때 그걸 기억하고 세심하게 발언권을 주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소심한 사람한테는 '혹시 ~~ 씨도 여기에 대해서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신가요?'라고 물어보고 대답까지 5초가량, 또는 더 길게 기다려 주는 것. 열정적인 사람에게는 '~~씨가 저번에 말씀해 주신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해서도 정말 멋진 답을 내려주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등의 약간 추켜올려 주면서 이전의 발언을 기억해 주는 세심함을 곁들이는 것.


자신이 튀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좋은 팀을 만들고 좋은 리더로 기억되고 싶다면 모든 사람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과 약간의 좋은 기억력이 필수다.


싫은 소리를 듣는 것도, 하는 건 더 싫어하는 나는 언제나 '목소리 큰 사람'이 되는 걸 싫어한다. 그렇게까지 주목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기도 하고 리더라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별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언제나 주도하며 자신이 돋보이고 싶은 종류의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안다. 그렇게 자발적인 버스운전기사가 되고 싶다면 그것 나름대로 본인의 선택이지만, 충분히 모두가 빛날 수 있는 팀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존중하고 존중받는다는 것. 나도 가끔 놓치는 경우가 많은 일이지만, '인정받는 것'을 이후로 미룰 줄 아는 인내심 깊은 사람이 곧 존중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누구 한 명 목소리 큰 사람을 꼽는 것이 아니라, '그분 덕분에 우리 팀 전체가 잘 됐지'라며 이야기하게 만든다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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