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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던민화 Feb 17. 2020

모던민화: 무엇을 그릴 것인가?

ⓒ Hana Seo

요즘은 책 작업에 매진하면서 기존에 작업했던 그림들을 수업 목표에 맞춰 새로 각색하고, 재작업해보며 지내고 있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를 외치는 나인데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어야하니 여간 정신 없는게 아니다. 


민화의 매력 중 하나는 본그림 이라고 하여 처음 시작할 때 직접 창작을 하지 않아도 되니 진입장벽이 낮아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꽤 완성도 있게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는 쉬운 접근성에 있다. 또 민화를 처음 그려보게 되면 순식간에 그 시간에 빠져들게 되는 몰입감이 아주 큰 매력이라고들 말한다. 평소에 2-3시간씩 뭔가 하나에 푹 빠지기가 쉽지 않은 바쁜 현대 사회인데 그림을 그리며 그 시간에 완전히 집중하고, 그것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게 되니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본그림'이라는 민화의 특성이 더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갈 수 있는 발전 가능성에 제약을 둔다고 생각한다. 크고 작은 민화 전시회들을 찾아보면 대체로 20년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똑같은 그림들이다. 전통의 맥을 잇는다고 생각하면 잠깐은 수긍이 갈까 싶다가도 진짜 그것이 우리의 전통이 되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려면 시대에 맞게 발전해 가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좀 더 욕심을 내보자면 나는 그리는 이가 모사를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그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현할 수 있길 바란다. 아무렇게나 그린듯한 조선시대의 민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그들이 제약없이 자유롭게 마음과 염원을 그림으로 드러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은 그리는 이를 닮게 마련이다. 나는 나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그 시간을 통해 나만의 색을 찾고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아가고 표현할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모던민화다. 


서하나의 모던민화 수업시간, 수강생들의 작업 중

백지 상태에서의 창작이 아니라 틀이 어느 정도 갖춰진 상태에서 약간의 창작을 가미해 본다면 과연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보통은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 관심있는 것을 작게 그려보는 것에서 창작을 시작해보라고 권유한다. 내가 뭘 좋아하지를 생각 해 보는 것이 스스로를 다른 각도로 들여다보는 작은 단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 내 마음속에 근사하고 커다란 아이디어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더라도, 일단은 작게 시작해보자. 누구에게나 모두 능력은 잠재 되어 있다. 다만 너무 과한 욕심으로 시작하면 마무리 짓기도 전에, 아니 중간까지도 못가고 지쳐서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작게, 대신 꾸준히 시작해 보는 것이 좋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해도 좌절할 필요없다. 머릿속으로 생각만하기 보다는 메모를 해가며, 낙서를 해가면서 풀어가보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 Hana Seo
ⓒ Hana Seo
ⓒ Hana Seo

예전에 책가도 연작을 하며 그렸던 것을 새로 다시 작업하면서 나는 빈 칸에 무엇을 그릴까 며칠 고민하고 있었는데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책장 한켠에 모아둔 다 쓴 향수병과 초가 담겨있던 유리병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래, 향기를 그려보자!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향수는 드물게 가끔씩 사용하는데, 그 빈도수에 비해  많이도 샀던 향수 브랜드가 딥티크였다. 그 때도 좋아했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해서 단상자 조차도 버리지 않고 아직 갖고 있다. 싸뺑(Sapin)이라는 초는 태우면 깊은 소나무 향기가 피어나 마치 숲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필로시코스(Philosykos)는 세련된 무화과 향의 향수이다. 이 향수는 몇 병이고 계속 사서 꽤 오랫동안 썼다. 



ⓒ Hana Seo

2014년 가을 이탈리아 포지타노(Positano)를 여행 중이었다. 높은 산 중턱에 위치한 숙소에서 나흘을 지내는 동안 저 아랫동네 해변까지 매일을 걸어서 내려가곤 했었다. 지중해를 앞에 둔 비탈길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예고없이 훅-하고 퍼져오는 짙은 무화과 향기를 마주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코 끝에 맴도는 것 같다. 평소에 필로시코스를 쓰면서 익숙해져 있었지만 야생의 무화과 

향을 맡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화과 열매에서 나는 향일까, 잎에서 나는 향일까? 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무화과 나무 한 두 그루는 길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지만 그때의 그 진한 향을 다시 맡아보진 못했다. 무화과 철에 영암에 가면 가능할까 잠깐 생각만 해 본 적이 있는데 기억을 더듬고 있다보니 다음 무화과 철엔 체험 농장이라도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 어떤 경험이 향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참 매력적이구나. 그 기억을 그림에 담는 내내 즐거운 요즘이다.  

ⓒ Hana Seo
ⓒ Hana Seo


무엇을 그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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