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 시애틀에 있을지 밴쿠버에 있을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지금, 어딜 가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다가도, 거리상으로 밴쿠버-시애틀이 차로 3시간 이내로 기후적인 환경은 거의 동일하다만, 미국과 캐나다라는 너무나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가보면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캐나다에 있으면 영주권을 신청하고 받는 데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고, 이 나라가 추구하는 방향이 나의 가치관과도 비슷해서(비록 세금이 엄청나지만) 여기에 눌러앉을까 싶다가도, 개발자로서 IT산업의 메카 베이 에어리어나, 클라우드 산업의 중심 시애틀, 테크 기업 중심은 아니지만 존재 자체로 멋있음이 폭발하는 뉴욕, 뜨거운 태양 아래 한국 음식점 맛집이 가득한 LA 같은 곳에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스멀스멀 나올 때가 있다. 엄마가 해준 말이 있지, 어딜 가나 다 총량은 비슷비슷하게 행복하고 힘들 거다. 그런 거 생각하면 그냥 깊에 생각하지 말고 기회와 타이밍이 맞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또 정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게 답인 거 같다.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2018년 밴쿠버에 온 지 3년이 넘었다. 그땐 그게 인생에 큰 변환점(한국 직장인-> 캐나다 공대생 -> 마이크로소프트 엔지니어)이었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도시, 밴쿠버에 짧고도 긴 기간 동안 살면서 느낀 점을 정리해보려 한다.
일단 2021.1.1 기준 현재 온도 8도, 캐나다 산다고 하면 지인들이 "으악 너무 춥겠다!" 하는데 밴쿠버는 한국보다 덜 춥고, 덜 더운 4계절 아주 온화한 날씨이다. 겨울에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별로 없어 눈이 많이 오지 않기 때문에, 눈 한번 왔다 하면 도시가 셧다운 돼버린다. 스카이 트레인(지하철) 멈추고 버스들도 다 멈춰버린다. 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는 날씨로, 습도가 낮고 햇살이 내리쬐는 아주 천국의 날씨이다. 이러다 보니 한국에서 봄꽃이 피고 가을 낙엽이 질 때도 항상 비슷 한 날씨를 가진 밴쿠버에 살다 보면, "아 대체 봄은 언제 와?", "아 대체 가을은 언제 와?" 이런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름은 천국의 날씨를 자랑한다. 7-8월의 밴쿠버는 비 안 오고, 습하지 않고, 햇빛이 내리쬐며, 그늘은 시원한 날씨로 밴쿠버 인들은 이 2달간을 위해 10달을 지낸다. 7-8월에는 바닷가에 사람들이 태닝 하러, 바비큐 먹으러, 수영하러 산으로 하이킹하러 자전거 타러 등등 매일매일 짐 싸서 밖으러 나간다. 무조건 즐겨야 하는 기간
하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지난한 우기 시즌이 다가온다. 가을부터 시작된 비는 겨울 내내 오고, 해도 빨리 지기 때문에 가뜩이나 일조량도 적은데 비 와서 우중충하다. 맑은 날이 거의 없고 부슬비가 부슬부슬 매일 내린다. 이번 주도 내내 비가 왔다. 이러다 보니 우울해지기 딱 좋은 환경이며, 비 싫어하면 와서 견디기 힘든 날씨가 이어진다. 나는 비 오는 날에 크게 영향을 안 받고 차분해져서 좋아하기도 해서 괜찮지만, 호불호 심하게 걸리는 날씨이다. 나는 매일 아침 오늘 할 일을 정리하는데, 한 가지 룰이 있다면, 해가 뜨는 날이면 모든 걸 접고 일단 산책하러 1시간 나간다가 있을 정도이다. 비타민 D 합성하러 나가야 한다.
밴쿠버 출신 친구한테 예전에 "이렇게 비가 매일 오면 우울하지 않아?"라고 물어봤었는데, 그때 친구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비가 오는 덕분에 밴쿠버는 항상 푸르르잖아"라고 말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이 많은 비 덕분에, 밴쿠버는 GREEN 푸르르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BC 주는 사계절 내내 초록색을 자랑한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다른 것으로 대체 불가능한 것 같다. 그냥 집 주변을 걸어도 자연이 멋들어지게 있기 때문에, 상쾌하고 스트레스가 풀린다.
게다가 공기가 정말 맑다. 한국의 미세먼지에 지쳐있던 나에게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공기. 폐가 정화되는 느낌이다. 이 또한 비가 이 울창한 숲을 만들어준 덕분이겠지.
서울이나 토론토 같은 도시에서 살다가 밴쿠버에 오면 "에게게...??? 이게 뭐람" 싶을 수 있다. 다운타운도 사실 걸어서 한 바퀴 다 돌 수 있고, 건물들 크기도 서울의 트윈타워 같은 의리의리 한 빌딩들에 비교하면 장난감 같은 빌딩들이라 풉 웃음이 나온다. 사실 밴쿠버는 밴쿠버 커넉스 이외에 스포츠 팀도 없고, 뮤지컬, 뮤지엄 같은 것도 상당히 부족하다. 토론토에 작년에 살면서 농구, 야구, 하키팀 모두 다 있고 뮤지컬 박물관 전시도 멋지고, 화려한 빌딩들을 보면서 우와- 역시 토론토가 크긴 크구나 했던 기억이 난다. 비교가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시골스럽기는 하나 가난한 시골이 아니다 보니 또 있을 건 다 있다. 밴쿠버의 하늘 위로 치솟는 집값에서 알 수 있듯,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이기도 해서 럭셔리 용품이나, organic 그로서리, vegan 레스토랑 등 있을 건 다 있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온화한 기후의 도시, 그리고 BC주의 산들이 있어서 하이킹과 스키, 아웃도어 스포츠의 천국이며, 바닷가라는 장점으로 해외에서 많은 부자 이민자들이 유입되는 도시이다. 또 시애틀 바로 위에 위치하다 보니 IT기업의 캐나다 지사가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마존 캐나다 지사가 크게 있고, 그 이외에도 소소하게 많은 IT 회사들이 있다.
스키, 하이킹, 사이클링, 러닝, 락 클라이밍, 서핑, 골프 등등, 자연과 함께하는 스포츠를 좋아한다면 밴쿠버는 최고의 도시이다. 차 타고 1시간 거리 이내에 스키장이 3곳 있고, 2-3시간 운전해가면 스쿼미시, 휘슬러(동계올림픽 개최했던 곳)등 자연과 놀 곳은 진짜 많고, 가까이 있다. 3면이 바다인 도시이고 공원이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자연이 정말 내 생활 속에 있다. 밴쿠버에서 이사를 3번 했는데 세 번 다 걸어서 10분 이내에 바닷가 산책길이 있었다. 자연이 얼마큼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지 겪어보기 전까진 몰랐다. 이젠 자연 없이는 못 살 것 같다.
이건 밴쿠버뿐만 아니라 서구권에 사는 분은 동감할 것 같은데, 나는 한국에서도 작은 편이긴 했으나, 여기서 정말 초소형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한국에서도 작고 마른 편이었는데, 여기선 정말 너-무 작고 너-무 마른 사람이 되어버려서, 운동으로 벌크 업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한국에 돌아가니까 오 근육이 많이 늘었네?라고 동생과 엄마가 말해주던데, 이젠 한국에서 마른 축에 끼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여기선 오늘도 헬스장에 가면 나 혼자 초소형 인간이다. 한국에 헬스장에서 스쾃 랙에 가서 30킬로 들고 하면 오? 꽤나 하는데 라는 눈빛을 받는데, 여기선 30킬로 들면 진짜 최약체에 해당된다. 30킬로 드는 사람 나밖에 없다. 여자들도 기본적으로 40킬로는 번쩍번쩍 든다! 멋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회식문화와 남들 가십거리 듣기였다. 술을 잘 못 마시기도 하고, 마시면 잠을 거의 못 자서 거의 안 마시는데, 한국은 회식 때 술을 강요하는 문화가 있어서 육체적으로 힘들었다. 그렇다고 막내 신입이 안마시기도 그런 분위기라 힘들었다. 또 다들 얼마나 남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지, 안 궁금한데 들어줘야 되고 또 호응 안 해주면 그 가십거리가 나 자신이 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 호응도 해줘야 하는 게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직장생활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야 하는지 책도 읽고 고민도 많이 했던 게 기억난다.
캐나다에서는 학생일 때도 직장인일 때도 아무도 나한테 뭘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우선 저녁 회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점심으로 팀 런치를 하더라도 참석하는 것도 자유, 집에 가는 시간도 자유, 뭘 먹는지도 자유, 술 먹고 싶으면 먹고 아니면 안 먹고, 그냥 아무 상관도 안 한다. 여긴 비건(채식주의자)이 많기 때문에, 음식점도 항상 채식 옵션이 있는 데로 가고, 피자를 시키더라도 채식 피자는 항상 시켜준다.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고, 타인에게 이래라저래라 참견하고 조언하는 것을 굉장히 무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들 가십거리 이야기하는 것도, 여기서는 훨씬 덜한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남한테 그렇게 크게 관심이 없고, 또 그런 걸 물어보거나 얘기하는 게 되게 큰 실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이, 결혼 여부, 어디 사는지 이런 거 내가 말하기 전까진 절대 안 물어본다. 내가 "난 노스밴쿠버 사는데.." 이렇게 먼저 얘기하면 "어 나도 거기 살아!" 이렇게 이야기가 되지, "어디 사세요? 나이가 몇이세요? 무슨 일 하세요?" 이런 거 초면에 절대 안 물어본다. 예전에 옆 팀 매니저가 하루아침에 잘린 일이 있었는데, 우리 팀 팀 미팅에서 옆 팀 팀장이 오늘부로 회사를 떠나게 됐다. 자세한 일은 개인 사정이니까 우리끼리 추측하거나 다른데 얘기하진 말자라고 하는데 다들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실제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가끔 회사에서 디벨로퍼끼리 의견이 달라서 heated discussion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그래도 정말 사적으로 안 받아들이고 회의 끝나면 다시 쿨하게 지내고, 다른 팀원들도 그 사건을 특별하게 삼지 않는다. IT 기업 특징인 건지, 캐나다 특징인 건지 모르겠으나 나와 너무 잘 맞아서 직장 스트레스가 훨씬 적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존중한다. LGBTQ+ 커뮤니티에 대한 존중과 지원도 많이 하고, 사람들이 서로의 다름에 익숙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관용의 폭이 넓은 것 같다. 물론 아닌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성에 대해 celebrate(축하) 한다. 캐나다의 정체성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너는 그렇구나? 나는 이렇단다, 우리 다르지만 서로를 배워가면서 재밌게 잘 지내보자!" 이런 마인드의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다. 사람 속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이런 마음이라고 믿으면서 지내고 있다.
이외에 #집값이 너무 비싸다, #의료시설은 무료이나 예약 줄이 엄청 김, #대마초가 합법인 나라이고 밴쿠버는 대마 데이도 있음(그날은 해변가가 연기로 자욱하다), #야식 시킬 데도 없고 밤에 놀데도 없음, #캐나다 사람들은 아직도 보드게임을 많이 함. 약간 아날로그 갬성이 있음.. 모여서 공놀이 하고..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순하고 덜 경쟁적임 등등이 있다.
나에게는 밴쿠버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내가 원하는 커리어로 전환도 이뤄주게 하고, 외국인인 나를 따듯하게 받아준 고마운 도시이다. 3년간 커리어를 바꾸기 위해서 외국어인 영어로 아등바등, 공대생으로 살아남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공부하면서 치열하게 지낸 기억도 있지만, 지친 몸을 이끌고 집 현관문을 열고 나갔을 때 마주하는 푸르른 숲과, 파란 바다, 상쾌한 공기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어떤 도시에서 살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밴쿠버는 독립하고 처음으로 정착한 나만의 온전한 집이자, 제2의 고향이다. 앞날을 불안해하고 설레 하고 고민하던 2018년의 나를 따스하게 안아줘서 고마워 밴쿠버야!
Main image: Photo by Mike Benna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