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진 Feb 17. 2024

제주일기-1




제주 애월항 인근의 무인카페 산책. 제주도를 올 때마다 꾸준히, 그리고 아무런 목적없이 이곳 주변을 지나가곤 한다. 



2010년 8월이었다. 무료하게 끝나가는 여름방학을 견디지 못한 탓에 주저하는 친구들을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제주도로 떠났다. 떠나기 열흘 전 봤던 '제주도 자전거 여행'에 대한 신문기사 때문이었다. 대구에서 부산으로 떠나는 무궁화호에 자전거를 구겨넣고, 곧이어 화물선으로 자리를 옮겼다. 배는 검게 물든 바다를 가르며 전진했다. 



제주항에 도착하자 화물칸이 열렸다. 전날 과음한 괴물처럼 화물선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토해냈다. 배에서 섬으로 미끄러지는 트럭들 사이에 하선을 유도하는 작업자가 있었다. 자전거를 가지러 왔다고 말하자 쌔가만 피부의 중년 남성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당장 자전거를 빼가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멍청하게 서있다가는 트럭에 깔려버리기 십상이니 그랬던 것 같지만, 그때는 그가 소리를 지르는 것마저 신기하고 즐거웠다. 마치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기적소리처럼.



자전거를 타고 항구에서 서쪽으로 출발했다. 용연계곡, 용두암, 이호테우해변의 등대를 지나고 나면 곧이어 애월이다. 애월항이 보이는 곳에 이르면 어디까지 왔나 확인도 할겸, 체력도 비축할 겸 자연스레 한번 쉬었다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만난 곳이 이곳 무인카페 <산책>이다. 무인카페라는 개념도 신기했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몸을 휘감는 에어컨 냉풍이 오래된 친구처럼 반가웠다. 오렌지 주스 한입 털어놓고는 사람들이 남기고간 포스트잇을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이때의 기억 때문에 나는 여전히 여행지에서 낯선 이들이 남긴 글을 즐겨 읽는다. 나도 파란색 포스트잇에 짧은 기록을 남겼다.



거의 10년만에 다시 찾은 이곳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색바랜 냉장고도, 아담한 싱크대도, 맛있는 커피도, 사장님의 다정함도 그리고 여행자들의 편지까지. 오래 전 남긴 나의 메모는 아쉽게도 찾지 못했지만 타인들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다시 스무살의 여름으로 돌아간다. 잔잔하게 깔리는 음악에 따뜻한 커피 홀짝이며 지난 주의, 지난 계절의, 5년 전의, 10년 전의 순간들을 마주한다. 머리로 떠올리는 기억이 아니라 계절처럼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이다. 회상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깝다.



고맙다. 이곳이 여전히 그대로라서. 그리고 여전히 내가 그때의 날들을 마주할 수 있어서. 다시 찾아간 옛 여행지들은 대부분 무엇을 잃어버렸거나, 변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변해버린 뒤였다. 그 어디서도 처음 만난 그 순간을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는 이곳도, 나도 그때의 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가게 문을 열고 20살의 내가 들어와 "다 마셨으면 출발하게 빨랑 나와"라고 소리칠 것만 같다. 



몇 년 전만해도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더 이상 하고싶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만약 지금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그저 얼음물이나 하나 챙겨주며 즐거운 방학을 보내라고 짧게 말할 것 같다. 마음이 그렇게 변해버린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바뀌었다. 아주 분명하게.



제주 애월항 인근의 무인카페 산책. 앞으로도 제주도를 올 때면 아무런 이유없이 이곳 주변을 지나갈 것 같다. 가게 창에 비치는 얼굴들 사이로 낯익은 이가 보인다면 손 한번 흔들어주며 씨익 웃고 지나가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렌지를 맞고 나서야 알게 된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