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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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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Mar 02. 2021

오렌지를 맞고 나서야 알게 된 것

그 겨울엔 피하고 싶은 행운도 있었다.

    그날도 으슬으슬 비가 내렸다. 교환학생으로 브뤼셀에 도착한 지 막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여러 나라의 친구들과 이제 막 친해질 무렵, 학교 측은 한가지 이벤트를 알려주었다.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뱅슈라는 도시가 있는데 해마다 열리는 카니발로 유명하다고 했다. 며칠 뒤면 축제가 시작되고 현지 학생들이 안내해줄 것이니 교환학생들이 가본다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고 했다. 구미가 당겼지만 고민되었다. 나는 이미 런던 여행을 계획한 상태였고, 만약 축제에 간다면 런던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출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확답을 주지 않은 채 런던으로 떠났다. 어떻게든 되겠지. 항상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런던에도 으슬으슬 비가 내렸다. 화려한 도시를 낯선 이들과 유쾌한 대화로 채운 멋진 시간이었지만, 한 가지 슬픈 사실은 4일 내내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내리는 빗방울이야 운치 있게 바라볼 수 있지만 문제는 너무 추웠다. 목은 움츠러들고, 어깨는 딱딱해지고, 마치 차가운 벽돌을 양어깨에 매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렇게 4일을 떠돌다 새벽 기차를 타고 브뤼셀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친구들을 만났고 무슨 오기에서인지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 뱅슈 행 열차에 올라탔다. 4일간 비에 젖은 생쥐 꼴로 돌아다니고도 눕기보다는 걷고 싶었다. 항상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뱅슈에도 으슬으슬 비가 내렸다면 정말 울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뱅슈에는 전날까지만 비가 왔다고 했다. 기차역에 내려 작은 광장을 지나 마을의 한 가운데로 들어왔을 때, 축제를 맞은 도시의 미묘한, 그리고 흥분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설렘도 잠시, 오래지 않아 추위가 으슬으슬 어깨에 내리기 시작했다. 퍼레이드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우리는 추위를 피하러 작은 바에 들어가 감자튀김과 맥주를 시켰다. 벨기에는 맛있는 감자튀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건 벨기에의 비 온 뒤 추위를 겪어보지 못한 자들의 낭설일지 모른다. 그날 먹은 감자튀김의 맛은 잊어버렸지만, 으슬으슬한 추위의 맛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좁디좁은 바 안에서 정오부터 흥겨워 춤을 추는 사람들, 퍼레이드를 보기도 전에 이미 만취한 여행객들은 이곳이 축제의 한 가운데임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내 퍼레이드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도 가게를 나섰다.


오렌지를 나눠주는 질들, "헤헷, 이렇게 친절하게 주는 것도 이번 뿐이라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퍼레이드가 시작되면 북소리에 맞춰 '질(Gille)'들이 행진을 시작한다. 질들은 알록달록한 옷에 타조 깃털로 머리를 꾸미고, 상의는 곧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 부풀려 입는다. 나막신으로 북소리에 맞춰 따각따각 소리를 내는데 마치 커다란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인다. 모든 질은 뱅슈 남성으로만 구성되며  꼬마부터 할아버지까지 나이대도 다양하다. 행진을 하며 구경꾼들에게 오렌지를 던지는데, 몇몇은 친절하게 손에 쥐어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온 사방으로 오렌지를 던진다. 특히 열 살을 갓 넘긴 것 같은 어린 질들은 마치 야구선수가 꿈인 것마냥 온 힘을 다해 던진다. 여기서 오렌지는 다가올 봄의 행운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장장 5일째 추위에 떨고 있었다.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차가운 오렌지를 맞는 것이 왜 행운의 상징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덩치 큰 사람들 사이로 쉴새 없이 머리를 요리조리 흔들며 피해 다녔다. 함께 간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렌지를 피하는 모습이 마치 빈 공간을 찾는 테트리스 막대처럼 보였다. 물론 이렇게 딴생각을 하는 순간에는 여지없어 오렌지에 얻어맞곤 했다.


질의 행진에 이어 등장한 아를르캥(Arlequin), 손 쉽게 행운을 얻으려는 자들에게 큰 깨달음을 준다.


    오렌지는 마치 폭죽처럼 온 사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다소 무섭기까지 한 이 축제에서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날아오는 오렌지에 대한 무서움조차도 사람들의 환호성, 신나는 악기 소리에 섞여 축제의 즐거움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오렌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피하는 것이 행운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즐거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행진에 맞춰 다 같이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고, 유격수처럼 오렌지를 낚아채고, 오렌지를 놓친 사람에겐 그것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우리는 단지 구경꾼이 아니라 함께 이 축제를 만들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서로 다른 사람들,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감정들이 섞여 하나의 추억을 만드는 것. 그것이 축제의 역할이자 여행의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서로 다른 것들에는 설렘, 즐거움과 함께 두려움, 피곤함, 으슬으슬 내리는 추위, 돌덩이처럼 날아오는 오렌지도 함께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뱅슈에도 으슬으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해가 지기 전에 다시 브뤼셀로 돌아왔다. 새벽부터 잠을 설치고, 낯선 곳에서 추위에서 떨며 기다린 것에 비하면 축제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만은 이곳에 오기 전보다 훨씬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기다림과 고초가 즐거움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 이는 그것을 경험하기 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 단단해진 마음을 동력으로 삼아 더 멀고, 더 힘들며, 더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게 된다. 어려움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겪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잠을 설치고도, 비에 홀딱 젖고나서도, 날아오는 오렌지에 맞으면서도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 뱅슈에서 시원하게 얻어맞은 것은 단순한 오렌지가 아니라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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