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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Jan 25. 2022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가 말하는 치유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바냐 아저씨,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 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평화롭게 쉴 수 있을 거예요.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요. 모든 악과 고통은 온 세상을 감싸는 위대한 자비의 빛 속으로 가라앉게 될 거예요. 그날은 평화롭고 순수하고 따스할 거예요. 난 믿어요. 굳게 믿어요. 불쌍한 바냐 아저씨, 울고 계시군요. 아저씨는 평생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오셨죠.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예요. 쉴 수 있어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는 이렇게 우리를 위무합니다.

수화를 사용하는 한국인 배우 유나가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가 연기한 바냐 아저씨를 위로하며 그의 등을 감싼 채, 긴 수화로 자신이 맡은 소냐의 대사를 이어갑니다.

영화 속 연극 <바냐 아저씨>의 장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중

'드라이브 마이카' ' 세에라자드' '기노' 3편을 잘 버무려서 서막을 연 감독은 안톤 체홉의 <바냐 아저씨>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스토리를 새롭게 탄생시킵니다.  멋진 감독이며 멋진 스토리 텔링입니다. 그리하여 칸영화제가 그에게 각본상을 안겼다는군요.


 영화는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서로 작용하며 함께 치유 과정을 밟아가는 시간을 많은 메타포로 그려냅니다.

 

 먼저 가후쿠라는 인물  -  그는 극 중 주인공이죠.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입니다. 오래된 빨강 SAAB 자동차를 운전합니다. 일본이란 상황에서 그의 차 핸들은 왼쪽에 위치한다는 사실이 그가 뭔가 불편한 상황에 처한 게 아닐까 추측하게 합니다. 어느 날 접촉 사고가 나고, 그는 녹내장 진단을 받습니다. 시야가 좁아지는 병이죠.

그의 상황을 그대로 표출하는 병명입니다.

그는 시나리오 작가인 아내와 단 둘이 아무런 문제없는 듯 완벽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자신의 결혼 생활이 파탄 나는 것이 두려워 모르는 척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합니다. "오늘 저녁 할 얘기가 있으니 빨리 귀가할 수 있어요?"   그는 진실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일부러 돌아다니다 집에 오고.......  아내는 지주막하 출혈로 쓰러져 있습니다. '본인이 빨리 귀가했다면 아내의 목숨을 건지지 않았을까?!'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리하여 본인의 차 안에서 아내가 녹음해 준 <바냐 아저씨> 대본을 들으며 대사 연습을 합니다. 스스로를 폐쇄하듯.


 가후쿠의 아내 오토 -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그들은 네 살 된 딸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낸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더 이상 아이는 갖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창작의 본능을 가진 그녀는 남편과의 섹스 중 스토리를 잉태합니다. 그러나 아침이면 기억 못 하는 그녀에게 가후쿠가 차 안에서 그 이야기를 상기시켜주고 그녀는 그것을 대본화합니다. 딸을 잃은 상실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녀는 작품을 할 때마다 다른 상대들과 섹스를 합니다. 그러나 분명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낀 듯합니다. 그녀가 지어낸 스토리를 볼 때......


 다카츠키 - 오토의 섹스 파트너였던 배우입니다. 그는 가후쿠의 연극을 관람하고 오토와 함께 분장실까지 찾아와 가후쿠의 심기를 건드렸던 인물입니다. 오토 사후 가후쿠가 연출을 맡은 히로시마 연극제에 바냐 역 오디션에 참석하여 밭탁되며 가후쿠에게 접근합니다.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는 오토가 섹스 도중 만들어낸 스토리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각각 알고 있는 기이한 인연으로 얶입니다. 오토는 그 스토리를 통해 모르는 척 살아가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과 분노를 표출합니다.

다카츠키는 가후쿠와는 전혀 상반된 스타일로, 본능을 가감 없이 표출하여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캐릭터라 할까요?!

그런 그가 가후쿠에게 얘기합니다.

타인을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

라구요.


 미사키 -  가후쿠가 히로시마 연극제에 참여할 때, 주최 측에서 주선해 준 운전기사입니다.  그녀는 홋카이도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출근을 위해 부드러운 운전을 해야 했던 학대받던 소녀였습니다. 엄마의 폭력으로 뺨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눈사태가 나던 날, 그 원한은 그녀가 혼자서만 빠져나와 엄마를 죽음에 갇히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인물입니다.

그녀의  힘든 정서는 어느 날 가후쿠가 "히로시마에서 마음이 편한 곳으로 데려가 줘"라는 요청에 쓰레기 처리장으로 안내하는 장면으로 표현됩니다.


 유나와 윤수 부부 - 유나는 말을 못 합니다. 수화로 의사 표현을 합니다. 윤수는 연극제의 담당관입니다. 그들 아름다운 한국 부부는 어느 날 가후쿠를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합니다. 운전기사인 미사키도 함께한 자리에서 많은 얘기가 오갑니다.  원래 무용이 전공인 유나는 유산 이후 몸을 쓸 수 없었고 그리하여 연극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그들 부부의 사랑은 아름답게 묘사됩니다.  그 자리에서 가후쿠는 미사키의 운전 솜씨를 칭찬하면서 전혀 존재감 없이 편하게 해 준다고 언급합니다. 칭찬이 쑥스러운 미사키는 식탁 밑으로 내려가 유나네 반려견을 어루만집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스타일 그대로 연극 <바냐 아저씨> 연습 장면이 오래도록 묘사됩니다. 감독은 배우들이 서로 말이 아닌 기운으로 교감하도록 감정을 배제한 리딩을 하도록 이끕니다.  그것도 일본, 한국, 대만, 필리핀 등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국어로.

 아내 오토 사후 바냐  역할을 못하겠다던 가후쿠는 다카츠키의 무모한 접근으로 인한 현실 파악과 죄책감이란 같은 상처를 공유한 미사키와의 교감 후 본인의 닫힌 내면의 문을 열게 되고 바냐 역할을 소화해 냅니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교감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받는 장면의 표현은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깔끔한 성격의 가후쿠는 차 내부에서 미사키가 흡연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 둘은 선루프를 열고 담배 연기를 함께 날립니다.

선루프 밖으로 담배 연기를 날리는 장면

 마치 그들 상처의 치유를 기념하는 제의를 치르 듯........


  감독은 상처를 공유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우리의 생에 꼭 필요함을 얘기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요?!


 에필로그는 미사키가 한국 마켓에서 장을 보고 한국의 어느 도로를 가후쿠의 빨간 SAAB를 몰며 달리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뒷좌석엔 유나네 반려견을 태운 채. 그녀는 영화 내내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띠며, 물론 그녀의 뺨에는 상처의 흔적도 사라진 채........



영화의 근간이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기노>에서 표현된 내용입니다.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이혼한 기노에 대한 표현입니다.

원래부터 아무런 성취도, 아무런 생산도 없는 인생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당연히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제 기노는 이렇다 하게 정의  내릴 수 없었다. 고통이나 분노, 실망, 체념, 그런 감각도 뭔가 또렷하게 와닿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렇듯 깊이와 무게를 상실해 버린 자신의 마음이 어딘가로 맥없이 떠내려 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둘 장소를 마련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도록 자신을 들여다보며,

"그래,  나는 상처받았다. 그것도 몹시 깊이"  

라며  외칩니다.  기노는 타인을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틱낫한 스님이 96세로(2022.1.22) 입적하셨더군요.

그분의 열반송을 옮겨 봅니다.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이 몸은 나를 가둘 수 없다.  나는 경계가 없는 '생명'이다.
나는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저 넓은 바다와 하늘, 수많은 우주는 다 '의식'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다.
나는 시초부터 '자유 그 자체'였다.
생과 사는 오고 가는 출입문일 뿐.
태어나고 죽는 것은 숨바꼭질의 놀이일 뿐이다.

그리하여 내 손을 잡고 웃으면서 잘 가라고 인사하자.  내일, 어쩌면 그전에....  다시 만날 것이다.

'근본 자리'에서 항상 다시 만날 것이다.
삶의 수많은 길에서 항상 다시 만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기는 왜 그리 힘든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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