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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Apr 13. 2022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거인의 상상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우고

추억과 열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우나니


겨울이 오히려 따스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메마른 구근으로 조그마한 생명을 길렀거니

여름은 우리를 놀래었다.

슈타른베르거호를 건너 소낙비를 가져와서

우리는 회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에 나가

호프 공원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고

한 시간 동안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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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  1편 '죽은 자의 매장' 일부입니다.

4월입니다.  벚꽃 흐드러지던 날, 새벽 미사 드리고 오는 길,  봄비로 벚꽃 잎 낙화하여

'세상에 영원한 건 없음'을 다시 실감하는 아침입니다.


 지난겨울 동안 많은 죽음을 겪어내야 했고, 허전한 가슴으로 역시 우리 곁을 떠나신 '이어령 <마지막 수업>'을 읽습니다.

그분의 특별한 언어 감각과 상상력에 '아하!' 감탄하며........

    영화 <토리노의 말> 장면들

 거인은 영화 <토리노의 말>에 대해 얘기합니다.

헝가리 감독 벨라 타르 감독의 작품이었죠. 저도 오래전 썰렁한 독립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보고 한참 침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감독은 니체의 죽음으로부터 그의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요양 차 토리노에 머물던 니체는 어느 날 우체국에 편지 부치러 가다가 늙은 말이 채찍질을 당하는 장면을 목도합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끌고 가려는데, 길이 미끄러우니 계속 미끄러지고....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늙은 말을 보고, 니체는 달려가 말 목을 끌어안고 울었답니다. 자기가 대신 맞으며 '때리지 마. 때리지 마.' 울다가 미쳤다 합니다.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웅얼거리고는 십 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토리노의 말'에서 영화 얘기는 시작합니다.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말이 늪에 빠진 수레를 끌고 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하는 모습, 한쪽 팔이 없는 마부와 그의 딸이 훍, 불, 바람, 물 등이 하나씩 사라져 가는 시간 속에서 먹을 것이라곤 감자밖에 없는 그 황량함을 지루하게 보여주는 영화.

 

 선생은 영화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주가 사라져 가는 이야기야. 천지창조를 거꾸로 돌리는 이야기지. 혼돈의 물이 가장 먼저 없어지고 폭풍 같던 바람이 없어진다네."

또 니체에 대해 언급합니다.

"'토리노의 말'은 니체에게 다가온 신의 콜링이라네. 얻어맞은 말이 예수야. 채찍질당하고 허적 대는 늙은 말. 그게 십자가를 메고 가는 JEJUS

 CHRIST 지. 그러니까 가서 말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던 걸세. 자기가  늙은 말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나? 가까우면 마부 하고 가까워야지. 그런데 니체는 그때 인간의 대열에 끼는 게 창피해서 인간을 거절했다네. 인간에서 벗어나려고 한 게 초인이거든."

 영화를 찍은 감독에 대해서도 '동양과 서양의 접경인 헝가리인'이기에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 반도 국가인 한국인인 우리가 훨씬 창조적이라고 평하십니다.  지명이 두 자로 이루어진 그들의 북경, 남경... 동경, 교토, 나라...

그나마 우리의 삼랑진, 조치원 등 융통성 있는 지명이 체면을 살렸다고 하시면서.....

언어의 틀에 갇히면 사고의 틀에 갇히게 되지.  자기 머리로 생각하면 겁날 게 없어.


 장관을 지내셨던 어른은 당시 '노견'이란 표현을 '갓길'로 바꾸었던 본인의 업적을 자랑스러워 하시더군요.

 

 문학을 하신 분으로서 소포클레스가 쓴 <필록테데스>를 소개하며,

상처를 가진 자가 활도 가진다.

고 피를 토하듯 말을 토합니다.

필록테데스가 무인도에서 살아남은 이유를 묻자

"영혼의 생명력 덕분이네. 필록테데스는 영혼이 죽지 않았어. 오히려 더 강럴해졌지. '나 아파. 나 상처 입었어. 나 외로워'라고 외치는 자기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았지. 끝없이 아파하는 자기와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그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맑은 영혼을 갖게 된 거야. 활을 잡게 되는 거지. '바라보는 나' 그게 자의식이고 자아라는 거야."

"나를 바라보고 나를 장악하고 내게 명령하는 나"

 


 어린 시절부터 영혼의 존재를 직감하고 죽음을 생각했던 선생은 소년 시절 보리밭에서 슬픔을 느끼며 눈물 가운데 굴렁쇠를 굴리던 경험을 88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재현합니다.

세계인이 모인 자리에서 영적인 장면을 펼쳐 보인 거죠.

지혜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슬픈가 말이야. 다른 생명체는 죽어도 자기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몰라. 신은 안 죽지. 그런데 인간은 죽는 것의 의미를 아는 동물이야.
신과 생물의 중간자로 인간이 있기에, 인간은 슬픈 존재고 교만한 존재지. 양극을 갖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

 

거인께선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명징한 정신력으로 하나라도 더 후손들에게 알려주고픈 바람으로 말씀하십니다.

죽을 때 뭐라고 해요? 돌아가신다고 하죠. 그 말이 기가 막혀요.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는 거죠. 생명의 출발점.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제일 쉬운 게 부정이에요. 긍정이 어렵죠.  다 부정해도 현재 내가 살아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어요. 숨을 쉬고 구름을 본다는 건 놀라운 일이에요."


  선생이 언급하신 영화 <토리노의 말> 마지막 장면은 결국 말도 죽고 물도 불도 끊어진 오두막에 딱 한 톨 남은 생감자를 두고 아비가 딸에게

 "야, 먹어"라고 합니다. 생명은 소중하니까...


  겨우내 전염병과 전쟁 소식과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황폐해진 마음으로, 우리에게 남기신  바람의 감촉처럼 <마지막 수업>을 들으며, 한 세기 전 황무지 같은 세상을 살아가던 폴 발레리가 남긴 시 <해변의 묘지>를 떠올립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남쪽에서 부는 세찬 바람은

내 책을 펼쳤다가 다시 닫는다.

세찬 물결은 조각조각 부서져

바위로부터 활기찬 모습으로 뛰쳐나온다.

날아가자, 치열하게 눈부신 책장들이여!

그리고 부숴라, 나의 파도여!

뛰어가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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