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동안 정신없이 바쁘던 시간을 보내고, 이제야 조금씩 여유가 생겨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는 호사를 잠깐이나마 누릴 수 있었다. 평일 저녁밖에 짬을 낼 수 없는 나를 위해, 녀석은 한 손에 꽃다발을 들고 멀리 지방에서부터 우리 동네까지 와 주었다.
특정한 추억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만나면 꼭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풋풋하고 미숙했던 첫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나누었던 따스한 마음들에 관한 이야기들. 이제는 20대 중반의 커리어 우먼이 된 그 녀석은 나를 만나 잠시 그때의 중학생 소녀로 돌아갔다.
처음 만났던 순간, 함께 쌓았던 갖가지 추억들, 시간이 날 때마다 나누었던 쓸데없는 이야기들, 어려움을 털어놓고 같이 울어주었던 날들의 얘기를 하다가 그 아이가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내게 말했다.
"샘은 아셨잖아요 제 상황, 어디에도 기댈 수 없어 힘들었던 학창 시절에, 유일하게 만났던 진짜 어른이 선생님이었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선생님을 못 만났다면 지금 저도 없으니까. 항상 감사하죠."
그 아이의 말을 듣고 대비할 틈도 없이 눈물이 왈칵 났다. 나는 뒤집어지려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말했다.
"아니야. 내가 고맙지. 나도 중학생 때 그런 아이였고, 나에게도 그런 은사님이 계시거든. 그분이 계셔서 지금 내가 여기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선생님한테도 그런 선생님이 계셨네요."
"그럼.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했던 학교에 내가 돌아온 이유는 그거 하나야. 나처럼 소외된 아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정말 해준 것도 없고 미안함이 더 큰데, 이런 얘기해 주면 샘은 부끄럽기도 하고 항상 고맙지, 진짜."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길을 돌아보게 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의 자신을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기억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한 시절을 함께 살아냈던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 아이가 나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만큼, 내게도 그 아이는 참 특별한 제자이자, 이젠 같이 나이 들어가는 친구 중 한 명이다. 지금은 각자의 일들로 바쁘고, 물리적인 거리도 꽤 멀지만 종종 작은 응원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으니 무엇보다 고맙다. 아마도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애틋한 이유는 어렵고 힘들었던 한 시절을 둘이서 가깝게 의지하며 버텨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이만 먹었지 내면은 전혀 철들지 않은 아이였던 나도, 흘러가는 시간을 타고 오는 동안 만났던 반짝임들 덕분에, '어른'의 모습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가며 자라고 있다. 아직 '진짜 어른'이 되려면 멀고도 멀고도 먼 것 같지만 그냥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었을 때, 최소한 예전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고 싶은 게 마지막 소망이다. 만났던 수많은 얼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지킬 건 지키고 매일 조금씩 성숙하고 싶다. 근데 또 죽을 때까지 철은 안 들 것 같기도 하다. 뭐 어때, 그게 나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