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택트 (Arrival), 2016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만난 적 없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직 만나서 대화하거나, 눈을 맞추지 않은 존재에 대해 애정을 가질 수 있을까. 뱃속의 아기는 탯줄로 강하게 이어져 있고, 내가 먹는 음식, 받는 자극, 느끼는 감정에 동요하니 어느 정도의 상호작용으로 쌓은 애착이 있을지도 모른다(유경험자 분들로부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예를 들어 꿈속에서 아련하게 본 듯한 전혀 모르는 존재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또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할 것인가? 이를테면 반려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가족이 되어도, 대개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퇴사를 하면 월급이 끊길 것을 알면서도 일단은 그만두고 다른 도전을 하는 이들도 많다. 어떻게 스스로를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본성을 넘어선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에이미 아담스 주연의 <컨택트(Arrival)>를 보고 난 뒤, 꽤 오래도록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내 주변에서는 칭찬 일색인데 호불호가 갈렸다고도 하고. 아무튼 나는 따질 것 없이 무조건 이 영화를 좋아한다.
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에서 온 비행물체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알아내려는 목적의 프로젝트 팀에 합류한다. 언어의 형식이 단지 생각의 표현뿐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결정한다는 언어학 이론 ‘사피어 워프 가설’에 기반하여,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 루이스는 헵타포드들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여기, 연구실에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다른 공간과 시간에서 자신의 딸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미래와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무너진 루이스의 사고 체계 안에서, 루이스는 미래에 만나게 될 자신의 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겪기도 한다. 영화의 구성이 정말 영리해서, 앞부분에 루이스가 딸을 낳고, 행복한 십여 년을 보낸 뒤 병에 걸린 딸을 떠나보내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 뒤, 헵타포드가 도착하던 날을 그다음에 보여준다.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기는커녕, 선형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 영화의 규칙조차 몰랐던 관객들 대부분은 이 전개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딸이 죽고 난 뒤 헵타포드가 도착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영화 후반부 루이스는 외계 생명체를 향해 “자꾸 보이는 이 아이는 누구야?”라고 물어본다. 아직 만난 적 없는, 하지만 앞으로 엄청난 행복과 엄청난 아픔을 가져다 줄 내 아이. 아직 만나지 않았다기에는 생생하게 그 시간을 살고 있는 내 아이.
외계 생명체가 떠난 뒤, 루이스는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를 낳기로 선택한다. 그리고 세상의 이야기들에 끝과 시작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너의 삶 너머에도 너의 이야기가 존재하니까.라고 아이를 향해 이야기한다. 담담해 보이는 나레이션과 달리 영화를 두 번, 세 번 보다 보면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에서, 아이와 잔디밭에서 놀아주는 순간에서 루이스의 얼굴에 다가올 이별에 대한 착잡함이 스쳐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처음엔 루이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미래를 알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는, 비극이나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슬픈 이별이 예정된 길을 왜 가려고 하는 걸까. 하지만 두 번, 세 번을 보고 난 뒤, 나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수 있겠다는 조심스러운 공감대가 생겼다. 그건 무조건적인 모성애의 신화나, 운명 결정론자여서가 아니다. 아마도 루이스는 이미 그 시간과 공간을 살았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하는 감정을 느끼는 미래의 엄마 루이스와 미혼의 루이스 사이의 경계가 이미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비선형적 사고방식을 터득해 버린 루이스에게 환상처럼 보이는 순간들에서 만난 딸은 이미 ‘겪지 않은 일’이 될 수 없어져 버렸을 것이다. 그건 단순히 ‘미래에 이런 일을 겪는다’라는 점괘를 받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직접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결혼한 지 일 년 여 된 지금, 나는 아이를 낳을 것인가라는 고민을 두고 이 영화를 떠올리고 있다. 나는 무언가를 사랑하면 극진히 몰두하고 작별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이다. 반려동물이 나보다 먼저 죽으면 너무 힘들까봐 키울 엄두를 못 내고 있고, 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난다면 최고의 삶을 살게 해 준답시고 나를 포기해 버릴까 두려워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간접적으로 접하는 육아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면, 그 삶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전혀 모르는 존재임에도 사랑할 자신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미룰 수는 있어도 언젠가는 결정을 하게 될 텐데. 만난 적 없는 존재에 대한 사랑이라는 희미한 예감만 믿고 더 힘들어질 수도 있는 길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을까? 예감이 확신이 되는 순간까지 우선은 더 기다려보고 있지만, 그때까지 난 항상 루이스를 생각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