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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ug 10. 2019

자꾸만 몸이 아픈 모두를 위하여

아픔이 길이 되려면 (2017, 동아시아)

사회생활 첫 몇 년 자주 몸이 아팠다. 감기나 계절성 알러지 같은 게 아니라 겪어본 적이 없는 통증들이 연쇄적으로 나타났다. 전화를 많이 받는 직무였는데 왼팔과 손가락, 손바닥이 아파서 고깃집이나 냉면집에서 가위질을 못할 정도였다. 그다음에는 두통이 찾아왔다. 호르몬 조절, 수면 습관 개선, 식이요법 등 두통에 좋다는 건 거의 다 해본 것 같다. 팔이 아플 때도, 머리가 아플 때도 병원에서 늘 정밀검사를 권했지만 과는 깨끗하기만 했다.


안 아픈 기분이 어땠는 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밤낮, 주중 주말 없이 아프던 그때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회사에서 낙인이 찍히는 것이었다. ‘몸이 그렇게 약해서 어떡하냐.’ ‘여자들은 유난히 스트레스에 약하다.’ 같은 말들을 듣는 데 이골이 나 연차를 내거나 병원을 가지 않게 되었다. 꾸역꾸역 출근하고, 점심시간이면 약봉지를 소리 안 나게 뜯어먹고 불 꺼진 회의실에서 눈을 감고 두통을 삭혔다. 약점 잡힐까 무리하게 열심히 일하는 동안 자연스레 성격도 나빠졌다. 후배의 당연한 실수에 짜증을 내고, 귀찮은 상사의 잔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폐쇄적인 인간으로 변해갔다. 당시 나와 같은 사번의 동기들 대부분 장염, 갑상선 저하증 등 각기 다른 고질병에 고통을 받았는데, 농담처럼 우리끼리 ‘회사 터가 나쁘다’고 말하곤 했다.


책상물림 직장인의 직업병은 세상에 모든 일 때문에 아픈 사람들 중 극히 일부, 그것도 경미한 축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통해 저자 김승섭 교수는 터가 나쁜 회사처럼,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개인의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건강이 위협받는 현실에 대해 사회학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자신의 증세가 세월호 탓이라고 증명해야만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단원고 생존 학생들의 이야기를 지나, 저자는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연설에서 "비가 올 때 우산을 줄 수 없다면 그 비를 같이 맞아주겠다."라고 말한다. 사회에서의 편견과 차별은 마음의 상처뿐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신체적 통증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느꼈던 내 감정은 존경심과 감사였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책장을 넘기는 내내, 연구자로서의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따스한 시선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이해하려는 저자의 노력에 깊이 감동받았다. 훌륭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어려서부터 입버릇처럼 되새기던 '배워서 남 주는' 것을 실천하는 것 아닐까? 이보다 더 배워서 남을 주려는 노력이 어디에 있을까.

 

내 두통은 처음에 팔이 아팠을 때처럼 어느샌가 슬그머니 나아졌다. 일 근육이 붙었나 보지, 이제 본격적인 직장인이 된 거야 하는 젊은 꼰대들의 조언을 들었다. 아프니까 청춘이었나 보군, 하고 넘어가긴 이상할 만큼 아팠는데. 김승섭 교수는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 데다가 그의 연구에서 말하기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넘겨버리거나, 애써 괜찮다고 생각할 때 우리 몸이 더 아픔을 호소한다고 한다.


"너만 아파? 우리 지금 다 힘들어!"


여러 비행과 범법 행위가 드러나며 현재는 거의 공중분해되다시피 한 어느 그룹의 리더가 콘서트를 마친 뒤 피로를 호소하는 막내 멤버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농담처럼 들춰진 일화지만, 조직이나 팀 단위로 움직여 본 사람은 한 번쯤 해 보거나, 들어봤을 수 있는 흔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도 다 힘들다고 어느 한 사람의 아픔을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왜 모두 힘든지를 따져봐야 하는 건 아닐까. 아프다고 말하는 아주 작은 목소리도 외면하지 않고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우리가 연대할 길을 찾을지도 모른다. 아주 뜻밖의 원인을 발견하게 되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묵묵히 견디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나는 분노나 원망을 유발하기보다는 아픔에 대한 공감에서 연대가 시작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생겨난 연대의 길이 다음 세대가 적어도 똑같은 고통을 겪지는 않게 해 줄 수 있다면, 사회적 질병의 전염성을 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말 그대로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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