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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Apr 13. 2019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어스, 2019

조던필 감독은 뭐랄까, 트렌디하다. 자기만의 색채에 대중성과 시의성을 잘 버무리는 콘텐츠 제작자라는 점은 부럽기까지 하다. 소포모어 증후군 없이 이번 작품도 좋은 평가에 로튼토마토 신선도도 높다. 그런데 2번째 작품 <어스>는 전작에 비해 되게 신선하다!라는 생각은 오히려 안 드는 영화였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는 도서며 학계며, 언론이며 할 것 없이 모두 우리 대 그들(US vs THEM) 논쟁이 몇 년째 화두인데, 이를 영화적으로 연장했다는 점이 이미 익숙한 메시지로 느껴져서였던 듯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조던필 감독의 개성에 대해 확실히 감을 잡게 해 주고, 앞으로를 기대하게끔 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가 세 번째 작품을 만들 때, 미국의 사회 문제는 무엇일까? 그는 그 문제를 무엇에 비유해 어떻게 풀어낼까?

어디까지가 우리인가? 이상한 질문이다. 10년 전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망설임 없이 '가족이랑 친한 친구들까지가 우리고, 나머진 남남이다.'라는 단순한 소릴 했을 것 같다.  '우리'는 내가 정겹게 느끼고, 그들의 행복과 슬픔이 내 것처럼 느껴지는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별 뜻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다르다. 오늘날 우리를 말할 때는, 거기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배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국을 '한국'이라고 표현하기보다 '우리나라'라고 부르는 것에 더 익숙한 한국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탈북자, 혼혈, 난민... 그들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분류된다.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는 '어디까지가 우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룻밤 사이 도플갱어와의 지독한 전쟁으로 풀어낸다. 영화 초반부 주인공 소녀는 끔찍한 경험을 하고, 30년 뒤 현재에서 남편과 결혼해 딸과 아들을 둔 채 살아간다. 어릴 적 살던 해변 마을 집으로 휴가를 오는데, 그날 밤 30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30년 전, 거울로 가득 찬 미로에서 자신의 도플갱어를 마주쳤던 기억이 있는데, 그 도플갱어 소녀가 자신과 똑같은 가족 구성을 이루고 그녀의 집 앞에 나타난 것이다. 주인공 가족과 똑같은 네 명으로 이루어진 그들 중 엄마는 자신들이 너희 가족의 '그림자'라고 말하며 그들을 해치려 한다. '당신들 뭐야?'라고 물었더니, 엄마 도플갱어는 '우리는 미국인이야.'라고 말한다. 이 대사가 암시하듯, 이 가족만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지하에 숨어있던 도플갱어들이 올라와 지상의 '나'를 죽이기 시작한다. 그림자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가족의 막내아들은 평소 조금 이상한 아이라는 취급을 받아왔지만, 오히려 도플갱어 가족이 등장했을 때 기지를 발휘한다. 자신과 명백히 똑같이 생긴 그들을 마주하고도 '이게 뭐지' 하고 멍하니 있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막내아들은 순순히 '우리들이야.'라고 가장 먼저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이 곧 우리라는 것을 아는 아들은, 도플갱어가 자신의 행동을 따라한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용해 위기에서 가족을 구해내기도 한다. 


반면 30년 전 도플갱어를 만난 적이 있는 엄마는, 시종일관 부지깽이를 든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자신의 도플갱어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가족을 지킨다는 심리에서였겠지만, 엄마가 도플갱어들을 때려잡는 모습에서 아들은 엄마의 숨겨졌던 야만성을 본다. 도플갱어들이 지상 사람을 죽일 때의 모습과, 엄마가 도플갱어를 잡는 모습이 어쩐지 너무 비슷하다.

영화 종반부에서, 도플갱어는 신비한 초월적 존재가 아닌 인간의 욕심으로 탄생한 복제인간이며 지하세계에 감금돼 지상 인간의 삶을 모방하며 사람답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도플갱어들은 말을 하지 못하지만, 찌르면 피 흘리고 죽는 인간인 점은 똑같았던 것이다. 엄마는 결국 자신의 복제인간을 죽이고 아들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도플갱어의 목을 비틀고 마침내 숨이 끊기자, 엄마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아들은 그 모든 상황을 고스란히 목격한다. 아들을 구해낸 뒤 엄마는 아들과 늘 하던 정감 어린 몸짓으로 손을 맞대려고 하는데, 아들은 주춤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미국 전역에 길게 손을 잡고 늘어선 도플갱어들을 피해, 멕시코를 향해 한없이 차를 타고 내려간다.


영화의 가장 마지막 반전은, 엄마의 회상(또는 자각 인지도 모르겠다)을 통해 드러난다. 30년 전, 지하세계에서 올라온 복제인간 소녀는 지상의 소녀를 기절시켜 지하세계에 묶어두고 지상에서의 삶을 가로챘다. 유일하게 지상의 언어(영어)를 할 줄 알았던 소녀는 지하세계에서 복제인간들을 연대하고 준비시켜 30년 만에 자신이 속했던, 그리고 한순간에 소외당한 지상 세계로 다시 찾아온 것이다. 영화 중반부에서 남편이 '이 마당에 멕시코에 가는 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물었을 때, 이 현상이 세계적인 것이 아니고, 미국만의 문제일 것임을 알았던 것은 그녀 또한 30년 전에는 지하세계에 있던 복제인간이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미국과 맞닿아 있는 나라여서 별 뜻 없이 멕시코로 도피한다는 설정을 넣은 것일 수도 있지만, 멕시코 국경에 크고 견고한 장벽을 건설해 미국과의 분리를 확실하게 하겠다던 트럼프의 대표적인 배제 정책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러모로 이 영화는 미국이 멜팅 팟 안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이런저런 재료를 '원래 우리 것이 아니다.'라며 걸러내고 있는 오늘날의 배제 현상을 대놓고 꼬집는 우화이다.

영화를 보고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다가 문득, '나와 똑같은 형상을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라고 상상해 보았다. 처음엔 굶주리고, 말도 배우지 못한 채 나의 그림자로 살아왔을 복제인간을 만난다면 연민과 미안함에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골이 상접하고 광기가 어린 '나'를 만나다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죽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연민도 잠시, 그 복제인간이 사랑하는 내 가족을 죽이려고 한다면? 눈물이 쏙 들어가고 어떻게든 지켜내 보겠다고 영화 속 네 명의 가족처럼 손에 잡히는 뭐든 휘둘렀을 것이다. '우리'라는 유대감을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인간은 별 수 없이 사랑하는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일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유대가 외부를 향해서는 칼날로 돌아가는 순간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오늘날 뉴스 기사에서는 목숨을 걸고 탈출한 탈북자들에게 '이렇게 문제 일으킬 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는 댓글이 많은 추천을 받는다. 이 경우는 주한미군이 조직적으로 마약을 밀반입했다는 보도에 '이렇게 말썽 피울 거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말하는 것과 무게가 다르다. 벼랑 끝의 사람들에게 '우리 살기도 비좁으니 한 발만 뒤로 좀 가라.'라고 말하면 그들은 추락한다. 


나는 여전히 '우리'라는 말이 주는 정다운 어감을 사랑한다. 예전 직장에서 퇴사할 때, 2년 후배이자 친구였던 동료가 써준 편지에는 그녀가 나를 친구들에게 지칭할 때는 성이나 이름이 아닌 '우리 대리님'이라고 부른다고 쓴 말에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혐오나 이분법적 사고를 강화하기 위한 '우리'에는 한번쯤 의문을 품어본다면 어떨까. 영화 <어스>는 바로 그 지점에서 머물러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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