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도시 이야기
발렌타인 데이는 다른 기념일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연말연초의 달뜬 분위기는 가시고, 화이트데이나 로즈데이와 같이 봄날의 따스함이 오기에는 아직 이른 2월의 중순. 겨울의 쨍한 차가움과 크리스마스의 반짝이는 여운 그 어드메. 그리고 일년 중 온전히 연인만을 위한 기념일이다.
연인만을 위한 특별한 이날을 위해 오늘 계획은 정말이지 완벽하게 짜두었다. 공들여 화장을 마치고 옷장 깊숙히서 아껴둔 옷을 꺼내었다. 그저 그런 스웨터와 가디건들 사이에서 검은 윤기를 빛내며 어서 날 입어 달라고 반짝거리는 코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쇠락한 파워 인스타그램 팔이피플의 막스마라 카피 코트 인데, 오픈 당시에는 25만원 정도였다가 중고나라에서 누가 사이즈 미스로 올린 걸 운좋게 20만원에 건졌다. 막스마라의 고급 스타일을 단돈 20만원에 얻을 수 있다니. 검정 물이 조금 빠진다는 평이 있어 아직 입고 나가진 않았는데, 오늘은 조금 빠져도 눈감아 줄 수 있다. 어차피 오래 안입을거니.
#발렌타인데이 #신난다 #차안밀리려나
다들 핸드폰만 보는지 올리자마자 댓글 달리는 수가 엄청나다. 코트 문의 댓글에 막스마라 브랜드 태그를 열심히 달아주는데 지잉- 진동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내 기분도 묘하게 진동했다.
“오늘이죠? 7시 판교 현대백화점에서 뵐게요.”
많이 따뜻해졌다고는 하지만 2월 중순의 공기는 아직 쌀쌀하다. 부츠 앞코가 바람에 시려올 때 쯤까지 걸으니 겨우 이천역 1번출구 간판이 보였다. 기념일이라 아울렛 가는 사람들이 많은지 평일 오후 지하철은 출퇴근길마냥 붐볐다. 아. 차타고 다니고 싶다. 라고 생각하며 아무 생각없이 추천 인스타그램 피드를 내리다, 한 피드에서 눈길을 멈췄다.
#발렌타인데이 #이런날은차가최고 #벤츠 #신형 #CLS400d
미간이 잠깐 간지러워졌다. 겨울의 건조함에 나의 피부는 쥐약이라 조금만 얼굴 근육을 움직여도 온 피부가 당기는 기분이다. 이러면 사진에서 미간 주름 나오는데. 갑자기 핸드폰 보는게 지루하게 느껴져 잠금 버튼을 눌러버렸다. 곧 다 와간다.
판교역에서 무수히 내리는 사람들을 비집고 나오니 진이 다 빠졌다. 이따가도 이렇게 붐비면 다 망가지는데. 다시 미간이 간지러워졌다. 3번출구로 종종걸음으로 나가는 길에 우렁찬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발렌타인데이 장미 사세요~! 한송이 3만원 하던거 저녁이라 2만원!”
뭐든지 때를 놓치면 저렇게 가격이 쇠락하는 법인가. 갑자기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가격 가치 같다는 병신 같은 말이 떠올랐다. 원래 계획없는 투자를 안하는법이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니. 하나 정도는 사자.
“빨간 장미로 한송이 주세요”
장미를 사들고 백화점에 들어오니 6시 50분쯤 이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백화점의 공기는 항상 독특하다. 값비싼 실크 스카프마냥 솜털같이 가벼우면서도 보석처럼 반짝여 그 빛으로 메워진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텅 빈 것 같다. 마치 무언가를 사면 딱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지닌 공기로 변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1층 매장에서 한 번도 산 적은 없지만, 오늘은 그 완성된 느낌의 공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등 뒤의 기류가 약간 달라진 걸 감지해 뒤돌아보니 세련된 옷차림의 한 여성이 나에게 머뭇, 다가오려는 것이 보였다. 문자를 할 때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나보다 두세 살 정도 어린 것 같았다. 추운 날씨에도 뾰족한 징이 박힌 구두에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빼곡히 박힌 실크 스카프가 묘하게 백화점 1층과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샤넬….”
“네 맞아요. 일찍 오셨네요.”
“네 집앞이긴 한데, 춥기도 하고 차로 오니 금방 오네요.”
세상 모든 사람들은 나 빼고 다 차를 타고 다니나보다.
“가장 큰 사이즈 맞죠?”
“네 맞아요”
그녀가 어깨에 매고 있던 샤넬 도빌 라지에서 검은 종이백을 꺼냈다. CHANEL이라고 선명하게 적혀진 마크, 시크한 검정색 배경에 고고하게 적힌 흰색 여섯글자. 드디어 내가 샤넬을 사는구나.
“3만원 맞죠?”
“네. 까멜리아도 들고 왔는데, 사실래요? 여기까지 오셨으니 2만원에 드릴게요”
까멜리아면 샤넬을 사면 달아주는 코르사지 같은 종이꽃이다. 잠시 고민을 했다.
“네 주세요. 그럼 5만원이면 되죠?”
반지갑에서 4단으로 접어둔 5만원권 1장을 꺼내어 값을 지불했다. 거래가 끝나고 아까 지하철에서 블로그로 미리 봐둔 백화점 2층의 카페로 올라갔다.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코트를 벗어 종이백 안에 두었다. 종이백이 꽉 차니 꼭 라지 사이즈 가방을 산 것 같았다. 좀 전 지하철 출구 앞에서 산 장미꽃을 앞에 두니 내가 꼭 원하던 그림이 나왔다.
#발렌타인데이 #추웠을텐데 #고마워 #샤넬
역시 명품은 보정을 적게 해도 그 자체만으로 빛난다. 만족스러운 피드를 올리고 댓글들을 확인하니 어디선가 백화점이 문을 닫는다는 신호인 노래가 들려온다. 벌써 8시인가?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들이키고 일어났다. 코트를 다시 입을까 고민도 했지만, 날씨가 따뜻해진거 같은 기분이 들어 코트를 입지 않고 이대로 가기로 결심 했다. 게다가 이렇게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가면 사람들은 분명 구경한다고 나와 조금 떨어진 발치에 있을 것이라 망가질 걱정도 없다. 마치 명품 쇼핑백을 들고 백화점 1층부터 7층까지 활보하면 아무리 붐벼도 쇼핑백을 든 사람 주변은 떨어져 걷는 것처럼.
저거 뭐야? 엄청 크네. 선물 받았나봐. 벌써부터 느껴지는 관심의 눈길을 음미하며 일어났다. 그때 발치에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아, 오늘 산 장미꽃이다. 사진에서는 쇼핑백과 어우러져 생명력이 넘쳐 보였는데, 어쩐지 꽃 혼자 있으니 냉장고 속 말라빠진 채소같이 보인다. 오늘의 임무를 다했으니 버릴까, 하다가 2만원이 아까워졌다. 이거면 까멜리아를 하나 더 살 수 있는데.
폰을 열고 익숙한 주황색 앱을 열었다.
방금 샤넬매장에서 받은 장미꽃 팝니다. 가방을 샀는데, 꽃을 주네요 ^^ 전 꽃 알러지가 있어서 판매해요. 지금 8시 넘어서 꽃집들 다 문을 닫은 것 같은데, 늦기 전에 발렌타인데이 준비하세요
최은경 작가님과 함께한 미니픽션 워크샵 - '사연있는 물건을 팝니다' 에서 써본 소설입니다. 평소에 자주 접하는 소셜미디어에서 보이던 인상 깊은 '창조경제형' 중고 물품과 인간 군상을 1:1 형태의 피드로 만들어 기억 어딘가 잘 넣어 두었다, 소셜미디어로 자아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의 일상에 담아 보았습니다. 우디앨런의 영화 <블루 재스민>의 재스민이 한국에서 인스타그램을 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요.
'당신의 도시 A Tale of Your City'는 서울 및 수도권 곳곳을 배경으로 하는 시티팝 소설입니다. 도시 안에서도 특정 지명-시청, 여의도, 삼성, 판교 등-을 중심으로 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엮어보려 합니다. 시티팝 소설은 어디 있는 유명한 장르는 아니고, 좋아하는 음악장르인 시티팝에 단순히 소설을 더하기 했습니다. 때로는 퇴근길 차들로 꽉 막힌 늦여름 퇴근길 강남대로의 들척한 바람같은, 때로는 마포대교 너머로 보이는 바닐라 스카이같은 여러 도시 군상들을 글로 그려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