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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담 May 18. 2016

기분 좋은 흔들림

2012년 6월.

남들이 보기에는 자유로와 보이는 프리랜서의 생활, 대중없이 일하게 되니 오히려 여행을 위한 시간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고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힘들게 얻은 여행 타이밍에 욕심이 많아 졌다. 대자연의 숨결, 생명력 넘치는 거리, 문화유적 등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을 원했다.
남태평양의 대자연을 가진 역동적인 서퍼들의 천국, 거대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 지어진 해안가의 사원들이 즐비한 신들의 섬 발리. 나에겐 유일한 선택지였다. 



울루와뚜의 거대한 해안절벽과 어우러진 사원들


‘낯선 곳에서 길을 잃다.’

무턱대고 오토바이를 빌렸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8천원 정도를 냈어야 하는데 한참 후에야 그 열배를 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가서 되지도 않는 영어로 차분히 따지니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발리의 전통마을 우붓은 사진을 찍거나 배낭여행을 하는 서양인들이 정말 많다. 여기가 아시아지역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오토바이를 타고 구능까위라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 가다보니 어느 순간 길을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두려움 보다는 두근거림이 더 커졌다. 서양인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어도, 원주민들의 자연스런 삶이 닮긴 토속적인 주거들과 논 등이 감상을 하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풍경들을 즐기며 계속해서 북쪽으로 가다보면 원하는 곳에 갈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을 가다보니 내가 원래 출발했던 우붓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혼자 실소를 했다. 나름 길눈도 밝고 방향감각이 뛰어나다고 자부했었는데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이었다. 모험에는 지도가 필요하다. 무언가를 이뤄보겠다고 그냥 열심히만 살아온 내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력을 계속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서있는 곳은 그대로였다. 삶에도 여행에도 나만의 지도를 그려야 한다.



우붓 거리의 상점 중 한곳


‘시간을 때우다’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잃느라 사진을 거의 찍지 못한 첫날과는 달리 둘째 날엔 무작정 걷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 했다. 카페에 들어가 샌드위치를 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그칠 듯 하다가도 다시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처마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보며 시간을 때웠다.
여행을 하려다 보면 으레 반드시 많은 것을 봐야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곳을 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여행 보다는 관광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한곳에 눌러 앉아 작은 공기의 조각 하나 하나를 차분히 느껴보는 것, 때론 그러한 상태가 쉽게 얻을 수 없는 감흥을 주기도 한다. 멍하니 낯선 풍경을 차분히 바라보다 보면 이 공간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나 모습들이 머리 속에 파도처럼 밀려들어온다. 그 순간 나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떠한 영상이나 음악도 수신할 수 있는 마법의 라디오가 된다. 


우붓에는 걷는 사람도 많지만 가만히 카페에 앉아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무작정 걷다.’

발리에선 정말 많이 걸었다. 우붓의 카페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그치자마자 걸으며 이곳저곳을 찍기 시작했다. 3시간 정도를 계속 거닐며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다 찍고 나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꾸따에서 밤을 보낼 때는 잠시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중간에 빠지는 곳이 없어 돌다 보니 꽤 오랜 시간을 걸었다. 나중에 지도를 보고 계산해 보니 약 12키로 정도의 거리였다. 발리에서 한 번도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꾸따의 으슥한 밤거리는 좀 무섭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난 화려한 건물보다는 토속적인 뒷골목을 좋아한다. 그런 곳에서 고의로 마치 길을 잃은 듯이 이곳저곳을 발길 닫는 데로 헤매며 손에 들고 있는 아무 카메라로나 사진을 찍곤 한다. 
내가 한 번도 밟아 보지 않은 땅을 점점 더 많이 밟을 때마다 내 발걸음에 점점 더 내공이 쌓이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 내공이 내가 무언가를 창조하려할 때 힘을 발휘 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항상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려 노력하고, 또한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일을 반복 하다 보니 막상 새로운 장소에 가도 큰 감흥을 얻지는 못한다. 인터넷이나 많은 영화 등을 통해서 시각적 충격의 홍수 속에 살다보니 자극에 점차 둔해져 간다. 그러나 굳이 멀리까지 여행을 가는 이유는 소위 인증샷을 찍거나, 보지 못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보기 위해서가 아닌 것 같다. 
때론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생각하러 가는 것 같다. 익숙한 공기 속에선 가질 수 없는 시각과 생각을 가지기위해서다. 매일 쓰던 언어를 한동안 쓰지 않고 낯선 사람들과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낯설음을 느끼고 그 낯설음이 편안해 질 때까지 익숙해지며 지루함도 느껴보고, 아쉬움도 느껴가며 고착되어 가던 생각의 흐름을 한바탕 뒤흔들어 논다. 매우 기분 좋은 흔들림이다. 그 어떤 것도 다시 도전하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블루포인트 베이


울루와뚜의 원숭이들에게 안경을 빼앗기고 안경없이 방문한 블루포인트 베이



따나롯 사원을 가는길은 서울에서 보다 극심한 러시아워를 겪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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