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서담 Dec 08. 2017

키잡이와 노를 젓는 인간

영상을 만드는 일에 대하여

 영상을 만드는 일을 다른 무언가로 비유하자면 단거리 경주는 확실히 아니다.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하는 데에 보통은 2달 이상이 걸리며 때로는 4달 이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굳이 비교하자면 장거리 경주로 해야 하는데 영상을 만드는 일은 고독하게 홀로 견뎌내야 하는 마라톤으로 비유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해관계가 얽히는 일이다. 


영상을 만드는 일은 배가 항해를 하는 일과 같다. 엔진이 달린 현대의 배가 아니라 사람이 직접 노를 저어야 하는 범선이다.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고, 아이폰과 페이스북이 끊임없이 자동 영상을 만들어내어 보여주지만 어떤 의도를 가진 영상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아직까지 누군가 수작업을 해야 한다. 누군가 노를 저어 배를 움직여야 하듯이 말이다.



흔히 영상의 결과물이나 영상을 만드는 것에 대한 책임은 영상을 만드는 영상 제작자인 감독이나 영상 디자이너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배를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키를 잡고 있는 것은 키잡이인 프로젝트 의뢰자다. 대부분 광고주라고 하기도 하고 고객사라고 하기도 한다. 배를 움직이는 것은 노를 젓는 사람이지만 배가 향하는 곳을 정하는 것은 의사결정권을 가진 키잡이인 것처럼 영상을 만드는 것은 영상 제작자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상이 만들어질 방향을 정하는 것은 프로젝트 의뢰 당사자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지중해의 항구 말라가에서 출발하여 신대륙의 어느 지역으로 탐험을 떠나는 것이 목표라고 해보자 후에 마이애미라고 이름이 붙여질 미지의 장소로 말이다. 대서양이라는 큰 바다를 건너야 하며 최종 목적지에 다다라서는 버뮤다 삼각지도 있으니 정말 쉽지 않은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려면 배에 탑승한 모든 사람이 합심하여 으쌰 으쌰 하며 열심히 수개월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어렸을 때는 언젠가 그런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합심하여 함께 신세계로 향하는 일. 그러나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몇 주가 지나서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우린 왜 아직 지중해인 거지?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 일인데 지중해 조차 벗어나지 못한다. 분명 매일같이 노를 열심히 저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부분은 노를 젓는 사람들이 원인이 된다. 


너 왜 노를 똑바로 안 저은 거야?


배가 아직 지중해에 있는 이유는 분명 키잡이가 갈팡질팡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키잡이들은 노를 젓는 이들을 탓한다. 노를 젓는 이들도 물론 방향에 영향을 미치기는 한다. 이쪽으로 가야 어디라던지 며칠을 직선으로 가면 얼마를 갈 수 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을 키잡이에게 해줄 수 있지만 대부분의 키잡이들은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자신이 키를 잡고 있다는 사실심취해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키잡이들이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지중해를 못 벗어난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회는 점점 발전하고 잇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역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키잡이들은 과거에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누군가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를 젓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가? 노를 젓는 삶에게 과연 희망이란 있을까?


 내 어깨는 하루에 천 번의 노를 젓는 것을  허용한다. (아마 마우스 클릭 횟수도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밤을 새우고 무리를 해서 하루에  천오 백번 정도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게 되면 내일은 분명 삼백 번 정도의 노질 밖에 하지 못한다. 그날 하루는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아도 이틀간의 노를 저은 횟수는 줄어든다. 이것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면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진다.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내가 삼만 번의 노를 저으면 끝낼 수 있는 일이라 쳤을 때 대부분은 두배 이상을 젓거나 세배 이상인 십만 번 이상의 노를 젓게 된다. 그 이유는 배가 가야 할 방향, 즉 노선을 정확히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를 젓는 나는 그래서 항상 키잡이가 싫었다. 아니 대단히 미워했던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왜 내가 삼만 번만 저으면 될 일은 십만 번을 젓 게하는 데다가 '왜 그 탓도 나에게 돌리는가? 세상은 잘 못 됐어. 언젠가 내가 키도 잡고 노도 저어서 저들을 비웃어 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천 번의 노질을 할 수 있는 하루의 에너지를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써버려 정작 노질은 칠팔백 번 정도밖에 못하거나 혹은 나는 하루에 이천 번도 저을 수 있어라며 자랑하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곤 했다.



 그런데 이 일을 시작한 지 십 년이 지난 지금, 설사 내가 키를 잡는다 하더라도 직선거리로 삼만 번의 노를 저으면 되는 일이라 해서 딱 삼만 번만 효율적으로 노를 저어 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일은 비디오 게임이나 동화책에서나 존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노를 젓는 일에서 가장 밑바탕에 깔려야 하는 것 중 하나다.


원래 항해는 갈팡질팡 폭풍우와 같은 외부의 방해로부터 선원들 간의 갈등 같은 내부의 방해에 영향을 받게 돼있으며 인간이란 동물은 그렇게 모여서 수많은 작은 실패와 비효율적인 시간들 속에서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그래서 생각보다 쉽게 항해가 끝나는 일도 때로는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끝까지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도 슬프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미워할 에너지를 쓸 시간에 나는 단지 하루에 천 번의 노를 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늘은 이천 번을 해야 한다고 누군가 채찍질을 하더라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나에게 오늘 하루 허용되는 천 번만 열심히 집중해서 저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마이애미에는 못 갔었도, 보스턴 정도에는 도착해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처음 영상을 시작했을 때 좋아했던 영화감독들처럼 영화를 만들게 되는 일은 대서양이 아닌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동해에 머물러있다. 바다를 건너는 일 조차 시작하지 못했다는 괴리감에 괴로워했던 날이 참 많았다. 내 인생이지만 그 인생의 키를 잡는 일도 사실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일이 많지는 않다. 생각보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직까지도 거친 풍랑이나 해류를 이겨내지 못한다.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에는 태평양이 주어지지만 누군가에게는 동해만 주어지기도 한다.

그 사실이 슬픈가? 슬프다. 그 사실만 생각하고 산다면...

인간의 사고라는 것은 참으로 넓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브런치에서 인기가 많은 글은 해외여행이라는 키워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봐도 확실히 그렇다. 내 글 중에서도 해외여행과 관련이 된 글들만 조회수가 유독 높다. 나는 어렸을 때 지구라는 영역을 넘어서 우주라는 이미지나 관념을 참 좋아했다. 한때 인터넷에서 쓰는 닉네임에 우주라는 단어를 항상 넣었었다. 훗날 내가 죽기 전에 우주여행이 대중화된다면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 실제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일을 만들려면 돈이 엄청 많거나 우주 비행사가 되기 위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갖는다면 그 인생은 비참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가타카'라는 영화를 참 좋아했었고, 우주에 가고 싶어 DNA에 의해 규정된 계급을 벗어나기 위하 인생을 바친 주인공악착같음을 동경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무언가 쉽게 가질 수 없는 것만을 동경하고 염원하며 현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그리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사고는 넓어질 수도 있지만 분명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깊어질 수도 있다.


 나는 겨우 노를 젓는 인간일 뿐인데 내 머리가 배의 꼭대기에 있다면 갈팡질팡하는 배의 방향에 나는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내가 건너야 하는 거대한 바다 만을 머리 속에 담는다면 그 바다의 크기만큼이나 내 머리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 대신 노를 젓는 내 팔의 근육에 집중하고, 좀 더 이해하고, 내가 붙들은 노의 무게와 촉감, 노가 젓고 있는 바다의 질감에 집중한다면 단지 그 단순한 노를 젓는 일에 대해서도 나는 한없이 깊어질 수 있다. 아마 우주만큼이나 깊어질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누군가는 자신이 이동한 거리만큼 성장한다고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간다고 인간이 성장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은 자신의 자리에서 혹은 어디에 있든 깊어진 만큼 성장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만큼 깊어졌다면 단지 인생에서 평생 노를 저었을 뿐이라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그저 한 천 번쯤만 노를 저어보려한다. 어쩔수 있겠는가? 그것이 나의 인생인 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의 SF가 그리운 날의 얼터너티브 음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