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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담 Jul 22. 2018

눈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삶의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정신병적 담론


제프 다이어의 다소 지루한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의 에세이는 뚜렷한 맥락도 없고, 주제도 없다. 스트리트 포토그래퍼의 캔디드 샷 처럼 그저 일상의 순간 중 하나를 글로 담아 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평범한 세상도 좀 더 아름답게 담아내는 듯한 시선이 느껴진다. 별것 아닌 풍경을 멋지게 담아내는 포토그래퍼의 시선 같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눈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제프 다이어의 글의 배경은 로마라는 도시이고, 이 도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가능한 것일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옥이라 부르는 나라에 살고 있다. 게다가 내가 사는 곳은 핫플레이스도 아니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지루한 동네일 뿐이니 이 곳에서 눈으로 영화를 찍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 한 것 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오래전의 나는, 과거의 나라기 보다 마치 다른 평행 우주에서 살고 있는 다른 존재로 느껴진다. 차원으로 분리되어있는 복제된 타인처럼 느껴진다. 복제에 대한 소재가 너무나 흔해져 버린 영화들 탓일까? 여하튼 그 ‘나’는 매일 같이 눈으로 영화를 찍었다. 그 눈으로 영화를 찍는 버전의 나는 이 나라를 벗어난 적도 없었고, 주변이 영화같은 풍경으로 가득찬 적도 없었으며 그를 둘러싼 풍경들은 복잡스러고 평범하고 시끄러운 서울 변두리 동네와 낡은 옥상 위의 풍경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분명 매일 같이 눈으로 영화를 찍었고, 자신의 영화를 사랑했으며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일을 꿈꿨다. (너무나 먼일처럼 느껴져 그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2015년 쿠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눈에 담겼던 아름다움이다.
그 시작에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당연하지만 카메라다.  


SLR 카메라의 펜타프리즘을 굴절해 들어오는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는 사실 ‘필름이 최고야’ 식의 필름 신봉자는 아니었고, 오히려 디지털을 선호하고, 디지털 인간에 가까웠지만 펜타프리즘이 들어가 있는 필름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던 세상 만큼은 무척이나 사랑했다. 특히 2호선 지상철 구간에서 전철이 들어오는 순간 자연스러운 산란광이 빚어내는 풍경을 뷰파인더로 바라보았던 순간 만큼은 영원히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마도 그가 촬영하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느꼈던 순간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감상적인 행위, 즉 눈으로 영화를 찍는다라는 헛소리와 그다지 관련이 없어보이지만 카메라 만큼이나 그’다른 우주에서 살고 있는 그 녀석’이 그 행위를 하도록 완성한 중요한 요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컴퓨터 그래픽이다. 그는 어쩌다 보니 건축을 공부하는 전공을 가지게 되었고, 둔한 손으로는 그림도 모형도 자신이 업어 3D라는 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그 툴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재현하는 일이 정말로 즐거웠다.  

 

특히 GI렌더링 기술이 발달되기 이전의 폴리곤의 플라스틱같은 질감이 싫었던 그는 컴퓨터 만으로 사진 같은 이미지를 재현할 수 있게 하는 GI 렌더링이라는 기술이 너무나 흥미로웠고, 낮은 컴퓨터 사양으로도 빠르고 쉽게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는 V-ray는 신작 영화 수십편을 합쳐 놓은 것 만큼이나 흥미로웠다. 그는 그 브이레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 튜토리얼을 따라하기 보다는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빛을 재현하는데에 집중했다. 광원의 형태라거나 그것이 반사되어 만들어지는 그라데이션들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해보려했다.  


 여하튼 카메라와 CG 두가지로 인해 그는 영화를 찍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일상은 신비로움의 연속이었다. 그가 영상을 만드는 일은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을 도구로 재현하는 일일 뿐이었다. 억지로 쥐어 짜내거나 할필요도 없었다. 사소한 빛, 빛이 갈라져서 그림자와 함께 패턴을 이루며 리듬을 만드는 순간, 하늘에 매일 같이 보이는 구름의 형태 구름이 먹는 핑크나 블루나 다양한 색채들 모든 것이 영화의 대상이었다.  

201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그저 찍어댔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혹은 '그'와는 정말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설명이 더 단순한다. 오컴의 면도날에 따르면...

 

그래서 어쩌면 이 일을 그만 둬야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카메라가 내 눈보다 훨씬 더 잘 찍는다.
카메라가 세상을 내 눈보다 훨씬 아름답게 담아낸다. 


 

그렇게 내 눈은 망가진 카메라가 되었다. 안경을 쓰고 있으니 어떤 의미로든 말이 되는 것이다. 망가진 눈은 경관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모두가 경탄하는 바다 건너의 풍경들을 바라본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익숙함에서 더이상 새로움을 발견해내지 못하고 바라보는 위치의 변화와 초점의 변화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을 더이상 하지 못한다. 

 

그저 모니터에 지친눈으로 누구나 생각하기에 아름다운 경관이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경관을 만드는 것은 아주 작은 차이다. 

 

우선은 낡은 것들과 새로운 것들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홍콩과 일본의 각진 택시들이 그렇다. 유럽의 클래식한 카페나 건물들이 그렇다. 낡은 것을 부숴버리지 않고, 새롭게 재활용한다. 무조건 부숴버리고 보는 우리나라의 방식하고는 다르다. 그 방식이 경관을 만든다.  


 그리고 디테일의 차이도 있다. 타일의 간격, 일정한 비상계단의 조도, 편의점 간판의 비율와 그것이 걸린 위치, 제한된 간판의 수라던가 사소한 디자인의 디테일이 경관을 만든다. 디테일보다 비용대비성과,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것이 주요 목적인 곳에서 좋은 경관이 탄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눈으로 영화를 찍는 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곳을 아름답게 좋은 카메라로 담아내는 문제가 아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지긋지긋한 일상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가의 문제다. 


나는 최근에 판교라는 익숙하지 않은 도시로 출근을 시작했다. 이제 이곳의 풍경이 많이 익숙해 졌는데 이곳은 영화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풍경이다. 빠른 시간 내에 쌓아 올려진 도시는 딱히 영화와 같은 풍경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당연히 낡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복제된 건물들 만이 빼곡하게 올려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곳에도 눈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모두가 헬이라 묘사하는 이 나라에서 이 땅에서 특히 비슷비슷한 건물들로 둘러싸인 이 판교 같은 곳에서도 눈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 삶을? 얼마나 더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일상을?


그렇게 이 질문은 생존의 문제가 된다.


일상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한 이유는 편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상을 영화를 편집하듯 편집할 수 있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업무시간은 타임랩스로 축약해버리거나 점프컷으로 넘겨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현실의 시간은 언제나 똑같이 흘러간다. 


그럼에도 눈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라는 헛소리는 아직은 가능하다라는 희망 혹은 정신병의 잔재를 남기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신피질을 적당히 마비 시키면 된다. 혹은 적당히 떨어지면 된다. 반쯤 눈을 감는데 눈을 실제로 감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반쯤 감는다고 생각해보자. 조금만 떨어져보자. 무의식을 불러와보자. 인터넷과 방송들을 가득 채운 선명한 여행 동영상이 아니라 카잔차키스의 기행문처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 아주 밀접한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을 넘나들어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글을 쓸 때 자신의 머리를 두부와 같이 부드러워진 상태로 만든다고 했는데 그와 비슷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의 정신으로 때론 경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눈으로 영화를 찍는 다는 헛소리다.  


올해 4월 나는 오키나와에서 인생에서 가장 지루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렌트카를 빌리기 위해 일본인들의 섬세하고 지루한 설계를 따라 한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오키나와의 건물과 풍경은 놀라울 만치 한국과 비슷한다. 자연마저 제주도와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앉아 있는 갈색 소파와 아이보리색의 벽은 한국에서 흔히 볼수 있는 백화점 면세점의 디자인이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오로지 숫자에 의존에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의미에서 여행이라는 행위에서 경관을 찾는일을 포기한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저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내 눈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쯤 작고 사소하지만 조금은 특이한 것 하나에 초점을 맞춘다. 정확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고객사에 납품할 영상이 아니니깐 적당히 눈대중으로 초점을 맞추면 된다.  


앞에 앉은 아주머니의 언밸런스한 핑크색 머리핀에 집중한다. 그리고 네거티브와 포지티브가 뒤섞인 노래를 듣는다. Radio HeadPlacebo같은 노래가 좋겠지만 오늘은 적당한 곡을 찾기가 어렵다. SparklehouseDon’t take my sunshine away 같은 노래도 좋다. 어린 일본인 여자아이가 유리문에 작은 손을 가져다 댄다. 자동문은 아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타국이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면세점의 풍경에 콘트라스트를 더하고, 필름의 속도를 다듬는다. 앵글을 타이트하게 상상한다. 작고 사소한 것들 갈색 소파위로 올라 온 핑크색 점하나 아이의 천진난만함 그래도 여기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 이 기다림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 조금 있으면 낯선 곳에서 운전을 해야한다는 두려움, 어떤 것이든 좋다. 부수고, 잘라내고, 이어 붙이고, 흔들고, 색을 뒤틀어버린다. 엄청난 마스터 피스는 아니더라도 주말 저녁에 맥주 한잔과 함께 감상할만한 영화 정도는 등장한다. 


다시 가장 지루한 도시 판교로 돌아온다. 낯설어진 그로부터 시선을 빌려온다. 초점을 맞추고, 정신줄을 살짝 놓아서 앵글을 변화시킨다. 가장 지루한 이 곳에서도 그가 감탄했던 빛의 변화는 존재한다. 복제된 듯한 건물들 사이에서도 빛와 그림자의 리듬감은 존재한다. 시끄럽고 무례한 군중들도 이제는 이야기 소재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으니까. 


출근하는 판교의 좀비 무리 사이로 여행을 하는 듯한 중국인 모자와 아이들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자기 몸만큼이나 거대한 캐리어를 두손으로 민다. 그들의 몸짓과 동작은 고된 노역을 하는 사람들과 같지만 그들의 신나는 발걸음은 놀이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잠시 그렇게 아직은 경관을 찾아낼 수 있다고, 혹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으며 눈 앞의 것들을 감상한다. 

 

그렇게 조금은 일상이 달라진다. 어쩌면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https://vimeo.com/6425666

2009년, 처음으로 동영상이 촬영되는 카메라를 샀다. 그저 모든 것이 좋아서 아름답게 보여서, 옥상에서 아무 것이나 찍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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