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삼
소금바치의 기억
예로부터 종달 아이들은 축구를 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종달리에는 모래펄이 넓게 펼쳐져 있어 아이들이 모래펄을 운동장 삼아 달리고 공을 차며 놀았기 때문입니다. 종달리의 뻘밭은 이렇게 유명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집 바로 앞도 지금은 포장이 되고 길이 나 있지만, 원래는 그런 뻘밭이었습니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어머니는 그 뻘밭에서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1950년생이고 그 기억은 5살 무렵의 일입니다. 다른 마을 사람들은 우리 마을 사람들을 소금바치라고 불렀습니다. 소금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종달리 사람들 절반가량이 포함됐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종달리는 제주에서 최고로 꼽히는 염전이었습니다. 썰물이 되어서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거기에 밭을 갈듯이 소를 부리거나 사람 손으로 바닷물을 골고루 뿌리고 말리고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그 모래를 거둬다가 물을 빼고 가마솥에 부어서 졸이면 소금알갱이가 됩니다. 부모님은 그렇게 만든 소금을 팔러 다니셨습니다.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나는 어려서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했지 돕지는 못했습니다. 소금 가마터도 기억이 나는데 논밭이 되면서 없어졌습니다.
소금밭이 논으로
화산섬 제주에는 원래 논이 귀합니다. 종달리에도 염전만 있었을 뿐 논이 없었습니다. 육지에서 소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염전이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구자춘 도지사 시절인 1950년대 말부터 염전 자리에 논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막는 대규모 간척사업을 한 겁니다. 24ha라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때 그 땅을 가구 수만큼 잘라서 마을 집집마다 땅 배당을 받았습니다. 종달 주민 모두 리사무소에 모여서 추첨을 했습니다. 작게는 450평, 넓게는 7백 평씩 땅을 갈라놓고 추첨을 해서 땅임자를 결정했습니다. 450평은 네모반듯한 땅이고 7백 평은 여기저기 자투리땅을 모은 거였습니다. 기대를 잔뜩했지만 벼농사는 실패로 끝났고 그 너른 땅은 그 후로 거의 버려졌습니다.
내가 열여섯 즈음이었던 때로 기억합니다. 어머니와 동네 몇 분이 10년 정도 쓸모없이 버려진 간척지 두렁에 모를 얻어다가 심어봤습니다. 별 기대도 없이 묘종 10개 정도를 그냥 한 번 심어보고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이삭이 달린 겁니다. 그때 마을에 김병국이라고 농촌진흥원에서 일하시던 분도 그것을 보고 ‘아, 이젠 가능하다. 벼농사가 되겠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마을 전체가 흥분에 휩싸인 순간입니다. 묘종이 잘 자라라고 흙도 더 올려서 논이 번듯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염전이던 땅이 논으로 탈바꿈한 겁니다. 그때부터 우리집도 논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제주에서 논농사는 짓는 곳은 강정을 비롯해 서귀포쪽 몇 군데뿐이었으니 이곳에서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수확량이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1년에 낟가리로 스무 가마니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염전이었던 곳이어서 그랬는지 품질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 쌀을 내다 파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집은 팔지 않고 식구들이 먹었습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보릿고개로 모두가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이었는데도 종달리는 제주도 내에서도 쌀밥을 가장 많이 먹은 마을이었습니다. 논농사는 15년 정도 지은 것 같습니다. 육지에서 쌀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정책상 논농사를 포기하도록 한 겁니다. 보상금 50만 원을 받고 논농사를 접었습니다. 내 나이 30대 초반의 일입니다. 문전옥답이었던 그 논은 지금 갈대밭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남영호 사건과 어머니
나는 10대 후반 젊은 혈기에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몇 년 육지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19살 때입니다. 여수에서 일하던 어느 날 뉴스에서 남영호 침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서귀포에서 출발한 배가 성산포를 경유하여 부산으로 가는 도중 좌초됐다는 거였습니다.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너네 어머니 이름이 신문에 나왔다”고 누가 전해주었습니다. 무슨 소린가 하고 급하게 신문을 찾아보니 1면에 어떤 사람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습니다. 내 어머니라고 하나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배에서 나온 기름을 잔뜩 뒤집어쓰고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몇 명 안되는 생존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길로 어머니를 만나러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여수에서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교통상황으로 10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막상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하니 정말 말문이 막혔습니다.
해녀이기도 하고 소금바치이기도 하고 농부이기도 한 어머니는 일곱 식구 먹여 살리기 위해 잠시도 쉴 틈 없이 일했습니다. 동네 친목의 아들이 부산에서 결혼식을 한다는 소식에 가봐야 한다고 남영호에 몸을 실었다고 했습니다. 배가 가라앉자 함께 간 고모가 옆에서 돌아가시는 걸 지켜봤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헤엄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배에 실었던 밀감 상자가 밀려 나와 바다에 가득했는데 어머니는 밀감 상자 대신에 나무조각을 하나 골라 의지해서 헤엄을 쳤다는 겁니다. 어두운 밤이었는데 어머니는 남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북두칠성과 삼태성 사이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해녀여서 그랬는지 하늘의 별자리를 볼 줄 알았던 겁니다. 5시간의 사투를 벌인 끝에 극적으로 어선을 만나 구조된 거였습니다. 그때는 영웅처럼 대단하게 관심을 끌었지만 보상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후에도 20년 가까이 더 사시다 7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삼당화
나는 종달초등학교 출신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종달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우리 딸이 4학년 때 학교에 들렀더니 교실에서 비가 줄줄 새고 있었습니다. 기와지붕의 학교는 지어진 지 25년이 다 되도록 보수가 안된 상태였습니다. 비를 맞으며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났습니다. 학교를 새로 지어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교장 선생님을 통해 교육청에 건의를 했습니다. 다행히 새로운 학교를 짓기로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먹고살기에 바빠서 교육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더니 막상 학교가 지어지기 시작하자 일손들을 더해 돕기 시작했습니다. 잔디운동장은 마을 사람들이 트럭을 몰고 해안가의 잔디를 캐다가 심어서 조성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당에 꺾꽂이해서 키우던 삼당화를 700본 기증했습니다. 이른 봄에 어느 꽃보다 먼저 꽃피우는 매화과의 이 꽃은 그때부터 종달초등학교의 교화가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뿌듯한 일입니다.
유채꿀향 진하던 고향
나는 젊은 한때 육지를 동경하여 나가 살다가 군대 대신 보충역을 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보충역만 마치면 다시 육지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들어온 날, 4월이었는데 유채꽃이 온천지에 가득했습니다. 유채꿀 향이 코를 찔렀습니다. 그 순간 ‘아, 우리 고향이 이렇게 좋은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이런 고향을 두고 어딜 나가냐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시인은 아니지만 유채꿀 향이 나를 고향에 붙잡은 겁니다. 어린 시절 염전이었던 뻘밭이 논으로 변했다가 다시 갈대밭이 된 지금껏 나는 부모님과 살던 그 집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보니 어려운 순간, 힘든 순간 견뎌오며 멀리 왔다고 생각되지만 결국 원점입니다. 와보니 여기 내가 출발한 곳에 있으니 말입니다.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