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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착한여행 Mar 15. 2021

무엇이 나를 키웠나
<김명선>

동네책방이 추천하는 우리 마을 사람책_구좌읍 종달리 ③


김명선 / 종달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가난한 바닷가 마을 아이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가난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월사금 걱정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집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없었어요. 책을 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지만 동네에 서점도 없었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이 옆 동네인 하도초등학교였는데, 그때 당시에 파격적으로 학급문고가 있어 다행히 책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 아이들을 마당에 모아놓고 내가 읽은 것을 막 풀어주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얘깃거리가 달리면 귀신 이야기로 빠지기도 했었지요. 



바닷가 마을인 하도에서 성장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물질을 못하면 여자 취급을 안했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영, 접영, 평영 같은 수영은 배운 적 없지만 물질은 했어요. 해마다 때가 되면 집집마다 한 사람씩 의무적으로 나와서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거나 소라, 전복을 따는 등 공동작업을 했는데, 어느 해인가는 제가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1, 2학년 즈음이었을 겁니다. 그날이 제가 첫 물질을 했던 날이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큰 물안경을 끼고 바다로 갔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물질을 했다기보다는 굉장히 바다를 즐기던 기억입니다. 지금도 조그마한 형태로 바다를 보기보다는 바닷속에서 굉장히 넓게 바다를 보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도 그런 추억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네요.



나를 키운 것은

나는 할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할머니가 나에게는 부모님이면서 보호자이면서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할머니는 심방이었어요. 내가 초·중·고를 다니던 1970년대에는 미신타파가 정부 정책이었어요. 그래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냈지요.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는 선배 한 분이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어떻게 너 같은 환경에서 너처럼 잘 자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할머니의 따듯함이 저를 감싸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마을 어른들의 배려와 돌봄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가 생리를 시작한 날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엇인지는 잊었지만 마을 일을 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생리를 시작했는데 나는 사전 정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놀라고 당황한 와중에 동네 아주머니가 나에게 생리에 대해서 처음으로 말해주셨습니다. 지식을 알려주고 정서적으로 배려해 주신 거지요. 그런가 하면 수영이라기보다는 바닷물에 뜨는 것, 지금 용어로는 생존 수영을 배운 것도 동네 언니에게서입니다. 마을 포구 가운데까지 저와 같이 뭔가에 의지해서 간 다음에 언니가 “이제부터는 네가 와” 하고 혼자 가버리는 겁니다. 내가 살아나려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언니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 열심히 팔다리를 휘저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저 혼자 생존 수영을 하게 된 거지요.



나를 키운 것은 이렇게 나를 배려해 주시던 마을 어른들, 유난히 사랑해주시던 선생님들, 속 깊은 단짝 친구들입니다. 나의 친척분들도 아껴주셨지만 마을에서 따뜻하게 돌봐준 그런 분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게 해주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리고 자연도 한몫했습니다. 돌담, 바다, 그리고 놀이터가 되어주던 작은 동산. 학교까지 가는 데는 어린 걸음으로 30~40분 걸렸습니다. 그 길을 오고 가면서 만난 자연이 준 그리움, 생동감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의 별과 이야기하고, 돌담과 이야기하고, 꽃과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마을과 소통하고

이렇게 성장한 아이는 자라서 과격하고 원칙적인 운동권 대학생이 됐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꿈이었던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교직 1년 차에 전교조 활동을 시작하고 해직되고 복직되면서 우여곡절 많은 교사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때까지도 마을이 배움터라는 생각은 못하고 지냈습니다.



시내의 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큰 도서관에서 실시하는 방학 독서 교실에 학생 세 명을 참여시켰습니다. 평소 독서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독서 교실에 참여했던 학생들에게 어땠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다시는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나로서는 실망이 컸습니다. 지역도서관 사업이 학교 일도 아니고 관행처럼 진행되는 것이지만 그냥 스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그 도서관으로 담당자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교실 기획안을 들고, 진심을 담아 내 의견을 전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도서관 사서 선생님과 서로의 의견을 편안히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후 몇 년간 나는 지역도서관에서 독서교실을 직접 진행했습니다. 이 일은 내게 마을공동체와 함께 하는 교육 활동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마을이 배움터다

내 삶의 테마 하나는 도전입니다. 교사 생활 중 도전한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2년간 교환교사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상상하고 꿈꿔왔던 혁신학교에서 근무했습니다. 새로운 교육적 상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특히 마을이란 배움터를 재발견하게 됐습니다. 물론 아이들은 사회 속에서 자라고, 사회가 배움터이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삶과 관련된 교육을 해야 된다는 기본적인 교육관점을 갖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학교를 중심으로, 담임을 중심으로, 나를 중심으로,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한 교육이었습니다.     

서울에서 2년간 근무하며 서울형 혁신지구 사업을 옆에서 보니 생각이 정리됐습니다. 아, 우리 아이들의 배움의 공간은 학교가 아니고 아이들 삶 전체로구나. 이게 가능하네! 이런 생각에 많은 사례를 찾아다녔어요. 그리고 그 꿈을 마을교육공동체라는 형식으로 고향에서 펼치게 됐습니다.



공모 교장이 되고

제 고향 마을 바로 옆 마을 학교인 종달초등학교 교장은 2018년 9월 공모로 됐습니다. 어쩌다 보니 교장이 됐다고 스스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공모에 나설 때는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앞서 말한 마을교육공동체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배우고, 마을에서도 배우고, 부모님에게도 배우고, 할아버지에게도 배웁니다. 보통은 학교에서 교육하면 학부모에게 협력해라 참여해라 말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봅니다. 교육을 함께 한다는 것은 협력이나 참여가 아니에요. 때로는 주관을 마을이 할 수도 있고 학부모가 할 수도 있고 학생이 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선생님이 참여하기도, 협력하기도, 안내하기도 하는 것이 마을교육공동체입니다.



얼마 전, 마을 동네책방에서 작은 행사를 치렀습니다. 교사들이 참여했고 이장님도 직접 교사역할을 했습니다. 이장님은 이날을 위해 몇 날 며칠을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작은 실험은 성공적이었습니다.

학교의 교장이나 교사들은 3, 4년에 한 번씩 바뀝니다. 하지만 마을 역사를 동네 어르신이 가르치면 지속적이게 됩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배움이에요. 더구나 폭넓게 자신의 삶과 연결해서 배울 수 있다는 게 마을교육공동체의 굉장히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 참교육을 외치면서 30년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이 마을 어른들에게 봉사와 사랑을 배웠습니다. 참교육이지요. 마을이 배움터라는 것을 이제 나의 경험에서 아이들의 경험으로 물려주고 싶습니다.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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