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정 / 몽캐는 책고팡 주인
고향이 좋아
하가리는 내 고향입니다. 자라면서 이웃들이 모두 내게 친절하고 용기를 준다고 생각한 적이 많은데, 알고 보니 대부분 친척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임씨 집성촌이었던 겁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 배달을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지역신문사 직원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아르바이트입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손수건을 선물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단순한 호기심 정도 갖고 있었습니다. 신문을 배달하다 보니 종이로만 접한 세상이 궁금했습니다. 우리 고향 하늘 위로 가끔 날아다니는 비행기를 보면서 막연히 다른 세상이 궁금하기도 했고요. 버스정류장에서 관광객들이 나도 모르는 마을로 가는 길을 물어보면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호기심이 내 삶을 바꿔놓지는 못했습니다. 서울의 대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그다지 열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 우리 마을이 너무 좋았습니다.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제주도의 대학에서 관광학을 전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서울로 가자!
대학을 다니다가 중국 베이징으로 어학연수를 떠나 10개월 동안 지냈습니다. 서울, 부산 등 다양한 대도시에서 온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었는데, 실력은 제주도 사람인 나와 내 친구가 더 뛰어났는데, 웬일인지 그 아이들이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무조건 서울로 갈 거야, 새로운 세계를 볼 거야라고 다짐했어요. 그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대학 졸업 후 그야말로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경기도 부천에 방을 구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지하철이 다니는 곳이면 다 서울인 줄 아는 촌 아이였습니다. 그곳에 살기 시작하고 나서야 내가 서울인 줄 알고 둥지를 튼 곳이 서울이 아니라는 것, 내가 아직도 서울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겨우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취업을 해야 하는데 족족 떨어지는 겁니다. 별다른 취업 정보도 없던 시절이라 중국어 실력 하나와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버텼습니다. 이력서를 100장 정도 쓴 결과 드디어 무역회사에 입사하게 됐습니다. 중국 음식을 회사나 학교에 납품하는 영업사원이었습니다. 일은 쉽지 않았지만,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내가 말이야, 월급 받고 보험료도 내고 월세도 해결하는 사회인이야, 이런 심정이었지요. 비록 당장은 5인 규모의 중소기업에 다니지만 언젠가 대기업에 다니고 잘 사는 멋진 도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명절 같은 때 고향에 내려오면 마을 사람들이 인정해주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 다니는 아이라고요. 사실 그 타이틀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허름한 집에서 새벽마다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하는 촌 아이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생활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꿈을 찾아
그때 회사 상사 중 한 분이 나를 예쁘게 본 모양입니다. 하루는 테헤란로라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이곳저곳을 보여주면서 세상은 넓다, 꿈을 크게 가지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내 꿈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연히 종로 쪽으로 영업을 나갔다가 대학 때 북경에서 알게 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를 통해서 통번역사라는 직업을 알게 됐습니다. 통번역사! 뭔가 내 길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은 이상보다 현실을 좇았는데 이제야말로 이상을 찾은 것 같았지요.
사표를 내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남들이 다 알아주는 대학원에 합격하자 주위의 시선이 달라지더군요. 현실은 냉정해서 학비 마련하느라고 휴학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쉴 새 없이 하면서 졸업했습니다. 소원했던 대로 대기업에 입사해 다시 북경으로 나갔습니다. 대기업 직원으로 베이징에서 통역사로 근무하다니, 꿈을 이룬 것 같았습니다. 입사 면접 때 일입니다. 당시 베이징은 대기오염도 심하고 해서 직원들이 오래 근무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언제까지 다닐 수 있냐고 묻더군요. 나는 빚이 4천이어서 대충 5년은 근무해야 한다고 대답했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돈도 벌고, 대학원 박사과정도 들어가고, 일도 배우고, 사회도 배우고, 성장에 대한 자극도 있었습니다. 뉴욕에도 가고 싶고 언어학자도 되고 싶었습니다. 최고가 될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지금은 돌아갈 때
직장생활이 3년에 접어든 어느 날 고향에서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미 한 번 쓰러진 적이 있는 아버지가 또 쓰러졌다는 겁니다. 급하게 휴가를 받고 귀향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나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충격이었지요. 북경으로 돌아갔지만 이제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즈음에 택시 기사님이 하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웃어도 하루, 울어도 하루’. 중국 서민들의 교훈인데 뭘 그렇게 아등바등 사느냐는 뜻이지요. 높은 뜻을 품고 잘 산다고 자신했지만 회사에서 실수하지 않으려 긴장하고, 학업 스트레스 받고, 사실은 지쳐있었습니다. 좀 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여기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냐, 설령 나중에 다시 오더라도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야.
할머니의 옛집
10여 년 만에 내려온 고향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며 다행히 통역사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 서른 넘은 딸이 시집도 안 가고 있으니 어머니께 눈치가 보이더군요. 시내에 집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주시의 월세를 듣는 순간 너무 당황했습니다. 중국과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면서 제주도 부동산 가격이 전에 없이 들썩이던 시기입니다. 사실 나는 도시를 동경하고 화려하게 살지만 내 고향만은 원시적인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습니다. 너무 급격히 변하는 제주도의 모습에 당황스러웠는데 무엇보다도 집세에서 그 변화를 실감한 겁니다. 타지를 떠돌면서 지하에도 살아보고 옥탑방에도 살아보고 원룸에도 살아보고 기숙사에도 살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시내의 월세 값 정도의 비싼 집에는 살아보지 못했거든요.
그때 문득 작은할머니가 남긴 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책들을 쌓아두는 고팡으로 쓰고 있던 집입니다. 우리 집과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전통적인 제주의 가옥이지요. 12평의 작고 낡고 누추한 이 집은 1913년생으로 할머니가 신혼 때 지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한 번 보수를 했다지만 90년 가까이 된 집입니다. 사연 많은 작은할머니는 홀로 이 집에 사시면서 우리 삼 남매를 돌봐주시기도 했습니다. 앞뒤로 열어놓은 문으로 드나들던 대청마루의 시원한 바람, ‘왕내’라고 부르는 할머니들 특유의 냄새, 언제나 내 편을 들어주시던 할머니, 우리에게 먼저 먹여주던 맛난 음식들…. 추억이 천 가지도 넘는 집입니다. 작은 방 세 개, 대청마루, 툇마루, 그리고 검게 그을린 흙벽 그대로인 정지에는 할머니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었습니다. 어느 날 가만히 정지에 있는 가마솥을 열어보았습니다. 세상에, 할머니가 쓰던 성냥이 무심하게 담겨있었습니다.
이 집이야말로 내가 그리던 고향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내가 이 집을 가치 있게 생각한다면 다른 이들도 가치 있게 생각할 거다, 이 집을 고치자, 치우고 손보면 살만한 집이 될 거야. 벼락처럼 이런 결심이 섰습니다. 비용이나 험난한 과정 같은 이성적인 판단은 그 순간에 없었습니다.
첫 시작은 월셋값이 아까워서였으나 옛집에 대한 그리움이 더해지면서 일이 복잡해졌습니다. 집을 편리하게 고치는 게 아니라 옛집 그대로 복원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구들도 그대로 살리고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을 그대로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전통가옥에 대해서 막상 아는 게 없다 보니 자료도 찾아보고 다른 마을까지 가서 강의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집수리에 들어가고 보니 이만저만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대나무를 구해다가 자르고 흙을 바르고 하다 보니 시간이며 비용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들었습니다. 수공비가 비싼데도 도배하는 아주머니들이 벽만 바르고 천장은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가버리기도 했습니다. 결국 새로 짓는 비용의 두 배 정도를 들이고서야 우여곡절 끝에 집이 고쳐졌습니다. 또 하나 그 과정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얻었습니다. 이 집에서 독립된 생활을 하려고 시작한 일인데 그 생활이 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움의 공간
어느 날 나는 이 집의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마흔 살 넘은 경단녀가 돼 있었습니다. 나는 서울과 북경을 거쳐 제주도에 정착했는데 더 삭막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욕망은 여전히 내 안에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고친 계기로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를 돌아보게 되고, 제주도에서 옛날 제주도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마음도 먹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뭔가라는 무기력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친정 오빠가 말을 건넸습니다. ‘이 집에서 책방을 해봐라, 네 꿈인 작가도 되어라’. 아, 이건가보다 했습니다. 언제인지 내 일기장에 작게 적어놓은 내 꿈 중 하나. 책방, 그리고 작가. 이런저런 여유는 없었지만, 형편에 맞게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방을 열었습니다. 내 형편에 맞게 책이 정말 적습니다. 와보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처받지 않습니다.
책방을 열고 무엇보다도 반가운 일은 동네 삼춘들이 사람들 없는 틈을 타서 종종 이 툇마루에 와서 앉아있곤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게는 그리움의 공간인 게지요. 더러는 어린 손주들 손을 잡고 일부러 찾아오시기도 합니다. 그분들이 책보다는 이 공간을 손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걸 압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신문 배달하는 어린 여자아이를 착하다고 해주시던 분들에게 내가 진 용기의 빚을 이 공간으로 상환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몽캐며 산다
큰 방에 책들을 진열하고 ‘몽캐는 책고팡’이라고 이름을 정했습니다. ‘고팡’은 제주말로 곳간이니 책 곳간이란 뜻도 되지만 책이 고프다는 의미도 됩니다. ‘몽캐다’는 내 꿈을 담은 말입니다. 꿈을 캔다는 것이 그 하나고, 두 번째가 ‘몽캐다’는 제주어로 ‘꾸물거린다’는 뜻입니다. 나는 여기서 꾸물거리고 싶습니다. 꾸물거리며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것입니다. 예전의 나였으면 작가라는 꿈을 향해 전력 질주하면서 노벨문학상을 목표로 삼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모전에 낙선한 내 작품에도 감동하며 눈물 흘리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러니 낙선작가라는 타이틀에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하다 보면 집중할 날도 오겠지요. 이 집에서 나는 이렇게 제주도식으로 성장하려고 합니다. 느리고 여유롭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사람으로.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