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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착한여행 Mar 16. 2021

더럭초등학교, 영 변해수게
<이완국>

동네책방이 추천하는 우리 마을 사람책_애월읍 하가리 ②


이완국 / 전 더럭초등학교 교사


선생님이 꿈인 촌 아이

나는 제주에서도 오지였던 산양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우리 마을은 대부분의 제주 마을처럼 밭농사 위주였습니다. 공판하는 날은 아버지들이 술 마시는 날이었습니다. 일등하면 좋아서 먹고, 등외하면 기분 나빠서 먹고. 고구마로는 절간고구마를 만들어 파는데 비를 조금이라도 맞으면 등외로 쳐서 가격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우리 같이 어린아이들도 노동 현장에 투입되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비 오기 전쯤이면 학교에서 공부하는데 뒤로 교실문이 빼꼼 열립니다. 어머니가 손짓으로 부르십니다. 비오기 전에 절간고구마를 거둬들여야 한다고. 



나는 고구마를 캘 때면 선생님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이 고구마를 선생님께 갖다 드려야지.' 쪄드시게 해드리고 싶어서 소쿠리에 담아 관사로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다 보니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가족과 함께 학교 관사에 살았습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 식구들 이름도 다 기억하고 집안 사정도 다 알고 일요일이면 학급 아이들 순서대로 일 도와주러 다니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일입니다. 내가 9남매 중 막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조카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마침 관사에 살고 있던 선생님이 연년생을 낳았는데 그 아기를 내가 많이 봐주었습니다. 교실과 관사가 가깝다 보니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어떨 때는 선생님이 ‘완국아 빨리 가봐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얼른 가서 아기를 안고 와서 수업을 받고는 했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어린 나는 그런 게 너무 좋았습니다.



더럭분교에 반해

그런 내가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음악 교과서는 그냥 가방에 넣어두고 들고 다니는 거였지 한 번도 꺼내 볼 일이 없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4학년 때 처음으로 여자 선생님이 오셨는데 시작이 노래, 끝이 노래였습니다. 종이 필요 없고 그냥 풍금 앞에 앉으면 그게 시작종이요, 끝날 때 풍금 앞에 앉으면 그게 끝나는 거였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나도 저런 선생님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도 길 가다가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이면 나도 언제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졸업해서 저런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놀아보나,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으로 공부하고 결국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고구마를 갖다 주고 싶은 선생님, 아이들이 아침에 깨어나면 내가 보고 싶어 빨리 학교 가고 싶어 하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1988년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시내 학교에서 8년 동안 근무한 후에 작은 학교에 가고 싶어 시골 학교에서 4년 근무했습니다. 그 당시 이 마을 연못에 과학실험용으로 뭔가를 잡으러 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연못 주변이 다 늪지대로 미나리 밭이었습니다. 학교는 나즈막하고 조그만데 삼나무 울타리가 높아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이 학교에 와야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가고 싶다고 보내주는 것도 아닌데 꼭 가고 싶었습니다. 어떤 학교인지 궁금해서 자꾸 학교에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물어봤습니다. 하도 전화를 자주 거니까 당신 누구냐고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알고 보니 학생 수가 서른 명도 안 되는 분교였고 선생님은 세 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느 날 운명처럼 더럭초등학교가 내 안에 들어온 겁니다.



아이들이 신나는 학교

드디어 바라던 더럭분교의 선생님이 됐습니다. 이 학교에는 상가리와 하가리 두 마을의 아이들이 다닙니다. 작은 마을이다보니 학교에서 야외스피커를 틀어놓으면 마을마다 울러 퍼집니다. 아침 일찍 가서 음악을 틀어놓으면 아이들이 "아, 왔다" 하면서 막 뛰어옵니다. 그럴 때면 내가 꿈꾸던 것처럼 ‘아 내가 보고 싶어 아이들이 달려오는구나’ 하고 기분 좋은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내가 좋다기보다는 학교가 집보다 놀 게 더 많으니 그런 거겠지만요. 그런 아이들을 현관에 섰다가 맞아주곤 했습니다.



선생님이 모두 세명인데 운이 좋게도 잘 맞았습니다. 교사로서는 그야말로 천국이었지요. 모여 앉으면 좋은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아이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아이들의 관계가 좋아졌습니다. 나는 4학년 4명, 6학년 7명 전체 11명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곳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너무 조용했습니다. 쉬는 시간이면 한다는 게 운동장 구석에 모여 앉아 땅을 긁으며 놀았습니다. 대외활동은 꿈도 못 꾸고 우물 안 개구리 같았습니다. 도시학교에서는 교실에서 뛰지 말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제발 뛰라고 시켰습니다. 아이들 기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 세명이 의논해서 체육은 전 학년 같은 시간에 진행했습니다. 전교생이 함께 축구시합도 하고 뛰어다니면서 조금씩 활기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승무북가락

교사가 되어서도 좋아하는 연수는 내 돈 내고 찾아다녔습니다. 서울풍물교육연구소에서 몇 년째 연수를 받다가 승무북가락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 전 학교에서 처음으로 도입해서 아이들과 함께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게 소문이 났는지 더럭분교로 온 3월 초에 전화를 한통 받았습니다. 호텔에서 큰 행사가 있는데 식전행사로 아이들의 승무북가락 공연을 부탁하는 겁니다. 겁도 없이 바로 승낙했습니다. 불과 석 달을 남겨두었을 뿐인데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학교를 다 뒤져보니 악기라고는 꽹과리 두 개에 찢어진 장구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아이들이 전부 모여 승무북가락을 하려면 북이 스물세 개가 있어야 합니다. 연수를 다니며 알게 된 서울의 국악기상에 부탁을 드리자 외상으로 두 말 않고 보내주었습니다. 하나에 50여만 원이니 천만 원이 넘는 돈입니다. 다행히 이 돈을 일 년 동안 받은 공연비로 다 갚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아이들의 흥미를 붙잡는 게 과제입니다. 일단 다목적실에서 먼저 학교에서 했던 공연영상물을 계속 틀어두었습니다. 보거나 말거나.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며 보다가 “우리도 저거 하나요?” 물어봤습니다. 아이들은 해야 된다고 하면 왜요? 합니다. 작전대로 “감히 너네가? 저절? 보여주기만 한 건데! 꿈꾸지 마”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우리 무시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아, 이제는 됐다 싶더군요. “너네 할 수 있을까?” “네!”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수업 시간엔 안되고 방과 후에 남아서 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할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창고 안에 보관해둔 북을 보여주니 아이들이 이거 우리가 칠 북이냐고 감탄이 쏟아집니다. 공연을 가야 되니 최고로 좋은 옷을 입히고 싶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공연복 디자이너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말씀드리니 재료값만 받고 해주었습니다. 드디어 첫 공연을 갔던 날이 생생합니다. 아이들 대부분은 시내의 호텔이란 곳을 처음 가봤습니다. 할머니랑 사는 아이가 공연장인 호텔에 들어가는데 자기 신발을 벗고는 바퀴 달린 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여기 우리 방 보다 더 깨끗하니 어떻게 신발을 신고가냐’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순진했습니다. 그날 아이들은 휘황한 조명 밑에서 공연했습니다. 물론 처음이다 보니 조금 얼어붙긴 했지만 나도 무대에 같이 오르고 해서 잘 마쳤습니다. 그때부터 학교가 시끄러워졌습니다. 박수와 관심을 받아 본 경험이 아이들 기를 살려줬습니다.



학생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승무북 공연으로 육지만 세 번 다녀왔습니다. 제주도 대표로 뽑혀서 대한민국 국악제, 전국초등학교방과후페스티벌 등에 참가한 겁니다. 공연을 하는 것은 4, 5, 6학년 아이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전교생이 모두 함께 여행 삼아 나갔습니다. 나는 이 학교에서는 교실 안 공부보다 공연 한 번이 더 공부가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학부모들은 별난 선생이 왔다고들 했습니다. 그러면서 후원을 해주셨습니다. 공연을 다니려면 버스를 빌려야 하는데 트럭을 내주는 분이 계셔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육지부로 공연을 나가게 되면 학부모들도 함께 가서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했습니다. 

학교가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면서 전학 오는 아이들이 늘어났습니다. 이번에는 이장님이 나서서 학교 살리기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마을 안에 30평대 공동주택을 열 세대 두 동을 지어 어린이 있는 가구를 유치했습니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때까지도 물론 여전히 분교 신분이었지만 학생 수가 두 배로 늘고 선생님이 여섯 분으로 늘어 복식 수업을 안 해도 됐습니다. 이런 걸 보면서 느끼는 것은 학교가 살려면 학교와 학부모와 마을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컬러풀한 학교가 된 사연 

부산 공연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전교생이 북을 치러간다니까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대기업의 광고 담당자도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컬러 마술사의 작품을 들고 그걸 구현시켜줄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장소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얼마 뒤에 학교로 감독이라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더럭분교로 낙점한 것입니다. 최종 낙점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내가 학교 현관에 써놓은 제주어도 한몫을 했다고 했습니다. ‘빙세기 웃으멍 노고록이 살게마씀’이라는 글입니다. 표준어로 뭐냐고 묻더라고요.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지요. 그 제주어는 광고 속에 표준어로 이렇게 번역(?)되어 나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훈훈하게 산다’. 



20일 동안 촬영에 돌입했고 색칠은 두 달 동안 계속됐습니다. 2012년 광고가 전파를 탔습니다. 그 광고 덕분에 더럭분교는 멋진 칼라로 변신했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됐습니다. 학교에 관광객이 오는 경우는 생전 처음 목격했습니다. 학생 수는 50명인데 주말 관광객은 500명이 넘었습니다. 조용한 작은 마을에 관광객들이 오기 시작하자 카페가 들어서고 식당들이 문을 열었습니다. 마을이 커지고 지금은 아파트까지 생겼습니다. 학생 수는 점점 불어 지금은 백여 명이 되고 본교로 승격됐습니다. 분교로 연명하다가 폐교 직전까지 갔던 학교가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광고 모델료로 전교생이 여행도 했답니다.



하가리에 터전을 잡고

이 학교에서 지낸 건 10년입니다. 전체 교사 인생 중 절반 정도입니다. 교사 생활의 마지막 1년은 다른 학교에서 했지만 명예퇴직 후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이런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에 조그만 땅을 사서 내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저 연못을 볼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는 생각.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선뜻 학교 앞에 있는 땅을 내주셨습니다. 이 마을에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져 학교를 그만둔 지금도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가리와의 인연이 15년째 이어지고 있지요. 



학교에도 한 번씩 가서 제주어와 인성교육을 해줍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저를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종종 우리 집으로 차를 마시러 오기도 합니다. 내가 학교에 있을 때 전교생이 함께 차 마시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월요일 아침 도덕 시간에 전교생이 교실 한 곳에 모여 차를 마시는 겁니다. 6학년이 후배들에게 차를 따라줍니다. 그 전통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가운 일이지요. 마을 사람들과도 여전히 가까워서 경조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려고 합니다. 나에게는 더럭 초등학교가 있는 이곳 하가리가 고향이나 다름없습니다.



발행처 ㈜제주착한여행 / 인터뷰·정리 권영옥 / 사진 지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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