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렇게 쑥물들어도 - 동우대학교 김용갑
몇 달 전 아빠는 어느 술자리에서 객쩍은 말을 했다가 무안을 당한 적이 있어. “솔직히 우리 때는 공부 안 해도 대충 취직은 됐잖아.”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아빠의 뒷덜미를 잡아채듯이 누군가 이렇게 찔러왔거든. “너희는 그랬는지 몰라도 우리는 그때도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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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인 서울’ 아닌, 지역 소재 대학을 나온 친구였지. 경기가 좋았던 시절 ‘대충 취직’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많았지만, 그때도 직장 고르는 일에 목을 맸으나 끝없이 좌절해야 했던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단다. 그러니 “우리 때는” 운운했던 아빠가 얼마나 어처구니없었겠니. 더하여 ‘취직 걱정은 별로 없던’ 사람들이 정권과 싸우고 통일을 논하고 혁명을 꿈꾸던 그 순간,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상대와 맞서 목숨을 걸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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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부일체>라는 영화가 있어. 졸업장을 타기 위해 고등학교에 편입한 ‘조직’의 중간보스가 깡패 세계보다 더 썩어빠진 학교 재단에 분노해 재단이 동원한 깡패들을 물리치고 학교를 구하는 영화였지. 1989년께, 속초에 있던 동우전문대에서는 이 <두사부일체>의 일그러진 실사판이 실제로 벌어졌어. 지역의 조직폭력배들이 학교 재단과 결탁해 온갖 이권을 챙기는 한편, 이에 저항하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엽기적인 풍경이 펼쳐진 거야.
1989년 한 나이 많은 학생이 동우전문대 양식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이름은 김용갑. 동기생들보다 서너 살 많은 1966년생.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한 사람이었어. 원래 이른바 명문대에 합격하기도 했지만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하고 수석 입학 장학금을 받아 동우대에 들어왔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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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였던 고상만(현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총괄과장)에 따르면 김용갑은 천하의 음치였다고 해. 그가 애창곡이었던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부르면 주변에서 그만하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올 만큼. 하지만 노래를 끝까지 부른 뒤 그는 “노래를 목청으로 부르나. 가슴으로 부르지” 하며 천연덕스럽게 넘겨버렸다는구나.
<솔아 푸르른 솔아> 노래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와.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시퍼렇게 쑥물 들어도 강물 저어 가리라.’ 천하의 음치 김용갑은 학생들의 권리를 송두리째 짓밟는 학교 당국에 맞서 학생들의 ‘참세상 자유’를 위해 온몸에 쑥물처럼 시퍼런 멍이 드는 고난의 길을 자청해. 동료 고상만의 회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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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6일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술에 취한 폭력배 10여 명이 김용갑과 나를 유스호스텔에 감금한 채 폭행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학생들을 선동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무차별 폭행은 처참했다. 술 취한 그들의 각목은 약간의 인정도 없이 아무렇게나 마구 휘둘러졌다(<오마이뉴스> 2012년 1월22일).”
무법천지도 이런 무법천지가 있을까. 동우전문대 학생들은 그야말로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깡패들과 싸우며 민주주의를 외쳐야 했지. 이 험악하고도 필사적인 싸움의 첫 고지는 총학생회를 구성하는 거였어. 그런데 문제가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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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칙은 학생회 선거 출마 자격으로 학점 3.0 이상을 못 박고 있었는데, 당시 깡패에 맞선 학생들의 학점은 하나같이 당시 유행하던 말처럼 ‘선동열 방어율’인 0점대였던 것이지.
예외라면 오로지 수석 입학생으로 공부도 잘했던 김용갑뿐이었어. 누가 권하기에 앞서서 김용갑 자신이 총학생회장 출마를 결심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있으면 우리 후배들은 또 당해. 난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 누군가 결심을 해야 하는데, 만약 내가 그 길에서 설령 죽는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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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 과정은 글자 그대로 조폭 영화의 한 장면들이었어. 유세는커녕 깡패들을 피해 도망 다니기 바빴고 김용갑 지지를 외치던 학생들은 으슥한 곳으로 끌려들어가 몰매를 맞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김용갑은 학생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얼마나 기뻤을까. 1990년 봄 강원도 속초의 한 대학에서 선거 결과에 터져 나온 학생들의 환호에는 얼마나 굵직한 피울음이 배어 있었을까. 그러나 학교 측과 깡패들은 집요했단다. 총학생회장 김용갑은 당선 후 20여 일 동안 무려 일곱 번 습격을 받아. 대체 경찰은 무엇을 했으며 법은 어디 있었느냐고 너는 묻겠지만 적어도 그 시절 합법은 무법의 발아래에서 침묵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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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정말 죽는다고 덜덜 떠는 동료들에게 김용갑은 말한다. “나를 당선시키기 위해 얻어터져 가며 선거운동을 해줬던 너희들을 어떻게 볼 수 있겠니! 또 나를 믿고 지지해준 학생들, 그들에게 내가 했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그리고 1980년대 내내 수만 학생들이 이를 악물고 내뱉었을 다섯 글자를 보탠다. “이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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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의 참극을 목격하고, 군사독재의 민낯을 보고,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동료들 앞에서 ‘이건 아니다’라고 절규했던 학생들처럼 김용갑은 깡패들의 캠퍼스를 목숨 걸고 거부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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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학생회장으로 스무 날 남짓 보냈을까. 총학생회 발대식 전날, 김용갑은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아. 김용갑이 사고 현장에 간 이유와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여간 사고사로 처리됐다. 학교 당국 간부가 “나를 배신한 자(누가 누굴 배신한다는 건지)를 용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 시켜서 차로 갈아버리겠다”라고 협박한 정황도 있었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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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삶을 알차게 일구기 위해 노력하던 한 청년, 그 형편에도 남이 힘들어하는 모습만은 보지 못했다는 착한 청년은 깡패들의 폭력 앞에 목숨 걸고 대들었고 이 참담함을 이어갈 수 없다며 머리를 들이밀다가 끝내 숨지고 말았어. 민주주의의 적은 비단 군부독재나 독점재벌 외에도 대한민국 천지 사방에 기기묘묘한 형태로 존재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누가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을 형극의 길에 스스로를 밀어 넣었단다.
아빠나 너나 살아가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 일을 여러 번 보게 될 거야. 아빠는 솔직히 그 앞에서 여러 번 비겁했어. 그리고 아빠와는 비교가 안 될 걸출한 1980년대 투사들도 “이건 아니다” 하고 고개를 저어야 마땅한 일에 눈을 감거나 오히려 너희들 보기에 ‘이건 아니다’ 할 만한 일들을 자행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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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월은 흐르는 거지만, 역사는 만드는 거란다. 누군가가 “이건 아니다” 부르짖고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힘이 되고 물살이 될 때 역사는 또다시 움직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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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전문대에서 폭력배들이 처음으로 매운맛을 본 건 김용갑의 1주기 추모제 때였어. 깡패들은 난장판을 피우며 추모제 준비 학생들을 짓밟았는데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학생들이 거짓말처럼 몰려들어 깡패들과 싸웠으니까. 여학생들이 울부짖으며 깡패들에게 매달렸고 남학생들은 평소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깡패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깡패들은 처음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어. 그 후 또 수많은 패배가 이어졌을지언정 이날의 성과는 학생들이 따낸, 아니 이 나라의 민주주의 수호자들이 쟁취한 값진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