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요 Feb 23. 2020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기생충>으로 함께 읽기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들은 더 평등하다

서슬 퍼런 전쟁의 시대에, 소련의 사회주의를 풍자한 작가가 있었다. 이름하야 조지 오웰, 그 작품은 <동물농장>되시겠다.


배경은 인간을 위한 동물의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존즈 씨’의 농장, 이야기는 그곳에 혁명의 바람이 일면서 시작한다. 모든 동물이 평등한 동물공화국을 꿈꾸며, 야심 차게 쿠데타를 일으킨 동물들.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일구어 냈지만, 그곳에서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어 기존의 사회의 과오를 답습하게 된다.


동물들은 읽고 쓸 줄 몰라서, 생각을 하지도, 의견을 주장하지도 못한다. 그저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꿈꿨던 세상은 <동물농장>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는 것쯤을 얄팍하게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유는 스스로 찾아 걸어 들어오지 않는다. <동물농장>의 지도자 계층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무리 중 한 명이 축출당하고, 농장은 독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개들의 이빨을 들이미는 공포 정치로 개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자유를 찾으려던 동물들은 새로운 규칙 앞에 또다시 통제받게 되었고, 누군가는 ‘존즈 씨’가 머물던 본채의 침대에서 세상 편안한 숙면을 취할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축출당한 배반자의 망령 때문에 두려움에 떠는 불평등을 떠안게 된 것이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동물농장>의 지배층인 돼지들이 표방한 것은 독재 체제였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슬로건 아래, 모두가 노력해서 지어 올린 ‘풍차’에 독재자 ‘나폴레옹’의 이름이 붙었다. 그들이 농장을 탈환했을 때 세웠던 일곱 계명들은 돼지들의 명분에 따라 두 마디가 더 붙거나, 삭제되고 전면 수정되기도 했다.


동물들의 기억은 시시 때때로 무시됐다. 돼지를 제외한 나머지 동물들은 거의 읽거나 쓸 줄 몰랐으므로 ‘글을 아는’ 돼지들이 지배하기에 충분했다. 공공의 적을 만들어 내 자신들의 과오는 덮고, 공공의 목표를 설정해 자신들의 부정을 감추었다.


동물들의 식량은 풍족치 않았는데 돼지들의 통계 숫자 놀음은 항상 우상향을 이어갔다. 농장은 날로 번성했지만 동물 개인은 항상 굶주렸다.


기생충은 다리가 몇 개인가요?


책을 읽고 나서 떠오른 것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었다. 그 영화에서 봉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계층 간의 투쟁이 첨예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마저 모호해져 버리는 계급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싸울 땐 싸워야 한다. 싸워서 이길 수 있고, 그것이 좋은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면 싸움을 못해도 한 번쯤은 주먹을 쥐어 봐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주장하기 위하여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동물농장의 동물들은 돼지들이 점거한 본채를 탈환하지 못하였고, 자신이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인간인지 돼지인지 분간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행복한 노예로 남았던 것이다. 기택은 반지하에서 대 저택으로 수직 상승하는 핸들을 잡았다. 그렇기에 냄새로 인간의 급을 나누는 박사장을 응징할 수 있었다. 역시나 봉감독의 페르소나 답게, 투쟁의 의지마저 없어져 노예 생활로 대충 만족해 가는 가족들을 살린 한 방은 송강호의 주먹에서 발사되었다.


동물들이 ‘슈가캔디 마운틴’의 환상에 젖어 현실의 고됨을 애써 지워내려고 한 것처럼 기우는 박사장네 대 저택처럼 큰 집을 사서 아버지를 꼭 데려오겠다며, 현실의 누추함을 못 본 척한다. 사실은 현실의 계급 차이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자신이 노예인지 주인인지 분간도 못하고, 막연히 주인이 되려는 꿈을 꾸기만 할 뿐이다.


슈가캔디 마운틴을 찾아서 -
왜 이상은 현실이 되지 못하는가

꿈꿀 수 없는 사회에서는 이상이 현실이 되지 못한다. ‘존즈 씨’의 농장에서 늙은 돼지 ‘메이저’가 꾼 꿈을 이제 <동물농장>의 그 누구도 꿀 수 없게 되었다. 사회주의에서는 ‘꿈’을 꿀 수도 없다. 계층을 전도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은 개들의 이빨에 막혀버리고 만다.


불행한 현실은 사람을 망상에 빠져 살게 만든다. 언젠가는 박사장네 대저택에서, 길든 까마귀 모지즈가 떠들어 대는 ‘슈가캔디 마운틴’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꿈꾸며, 고된 현실을 묵인해버린다. 이는 지독한 패배의식이다. 계급이 나뉘어진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느끼면 바꾸어야 하는데,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고 개들의 이빨에 굴종하고 만다. 문광이 근세를 지하실에 숨겨놓고 박사장네에 기생하면서, 그 집의 가정부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면, 먹고 자는 곳을 제공해주는 박사장네를 주인으로 여기고 노예생활을 자처하는 모습이 마치 독재자 돼지 ‘나폴레옹’의 치하에서 안빈낙도하며 현실을 부정하려는 나머지 동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다. 그들의 미래는 비현실적이다. 그들의 현실 또한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존재한다. 그들은 유령처럼 지하를 떠돌고, 숙주가 보이면 달려들어 기생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이를 ‘꿈’에 투영시키고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 오히려 숙주의 죽음은 기생충의 죽음을 의미하므로 이들은 서로 기막힌 공생을 한다. 이들의 이상은 꿈꾸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에 현실이 될 수도 없다. 그저 먹고 자는 것만 충족이 되면 ‘오케이’라는 자기 의지 없는 사람들과 그들을 밟고 서서 온갖 이익을 챙겨 먹는 욕심 많은 자들 때문에 ‘슈가캔디 마운틴’은 한 걸음 더 물러나고 만다.


이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한다면, 우선 이상을 꿈꾸어야 한다. 개인의 의지가 묵살당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꿈’ 꾸지 않는다. 불공정에 대항하고 불평등에 맞서야 한다. <동물농장>의 동물들이 글을 깨우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알았다면 그들은 이미 돼지들을 몰아내고 ‘슈가캔디 마운틴’을 건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상적인 집단에서도 또 새로이 욕심을 갖는 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체제를 부수는 것은 개인의 탐욕이다. 또한 우월한 개인이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는 무력감과 패배의식이 ‘이상’을 ‘현실’로 만들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반테 페보,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