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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r 03. 2020

안톤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전염병의 시대, 주말에 침대에 누워 읽을 책 한 권 추천합니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 자,
단편의 무게를 견뎌라

요새 나날이 진풍경이 이어진다. 그렇게 북적이던 사거리가 한산하고, 우리 동네 공원을 끼고 크게 들어서 소위 말하는 ‘만남의 광장’으로 통했던 스타벅스에도 사람이 몇 없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지금, 주말마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예민해지는 우리들을 위해 권해주고 싶은 책이 한 권 있어서, 오래간만에 키보드를 두들겨 본다. 바로 안톤 체호프의 단편을 모은 <체호프 단편선>이다.


죽음을 소재로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안톤 체호프는 죽음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을 많이 썼다. 체호프는 소설가이자 의사였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키워드 ‘죽음’, 그리고 ‘죽음’의 최전방에서 생명을 사수하는 의사가 쓰는 소설이라 그런지, 유독 전염병과 죽음에 관련된 소설이 꽤 된다.


장티푸스에 걸려 죽은 주교의 이야기, 전염병에 걸려 고향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여동생이 전염되어 죽어 실의에 빠지는 군인의 이야기, 남편이 디프테리아로 죽고 나서야 후회하는 여자의 이야기 등... 천 년 전에 쓰인 이야기들이 신종 바이러스로 초토화된 미래의 쓸쓸한 거리를 미리 보고 오기라도 한 양 지금의 상황을 비슷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체호프가 공통적으로 소설을 통해 얘기하려고 했던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바로 속세의 모든 것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만 가치 있고,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아름다운 소녀의 미모도, 평생 써도 다 못쓸 정도의 돈을 가진 은행가도, 미래가 촉망되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가난한 학자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우러러보고 공경했던 주교 또한 죽음 앞에 무력했다. 죽고 난 뒤 추억으로, 또는 기억으로 전해 내려오다 까맣게 잊혀졌다.


체호프에게 죽음이란 ‘자유’의 끝을 의미했다. 무엇이든 ‘자유’가 없으면 소용없었다. 한 청년 변호사와 일류 은행가 사이에 벌어진 <내기>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자유의지를 빼앗긴 청년은 죽음과도 같은 삶을 살며 돈도 명예도 모두 부질없고, 오직 진리만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대신하여 주어질 큰 보상도 마다하며 자유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죽었다


그는 유한한 것들을 경멸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춘의 아름다움, 사랑의 불꽃, 돈으로 가득 찬 금고, 만천하를 호령하는 빛나는 명예. 그런 것들은 유한한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시들어버리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놓고는 배신을 하고, 많은 돈을 내기로 날리고, 죽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명예를 지켜봐 왔던 체호프는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믿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가까이했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두려워서 죽고, 아파서 죽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죽인다. 그가 쓴 다양한 죽음들을 읽어 본 뒤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현재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당장 내가 내일 죽게 된다면 어떤 것을 할까?


떠올려보니 샤넬백을 사거나, 산드로 원피스를 사거나, 페레가모 슈즈를 사는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저 가족끼리 식탁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졌다. 그리고 미워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용서를 택하겠다는 생각도. 용서가 분노보다 더 큰 그릇을 가졌기 때문이다.

체호프는 죽음을 2년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그때 쓴 작품이 <주교>... 한 청년이 주교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인내와 끈기로 버텼을까. 그렇게 쌓아 올려간 빛나는 성취가 전염병 앞에서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아프게 무너져 내리는지 묘사돼 있는 것을 보면, 체호프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청년은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읽고 쓰며, 외로움을 견뎠고, 드디어 주교가 되어 자신이 태어난 마을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미사를 집전하고 종교 행사를 할 때에도 가슴 한 구석에는 무엇인가 결여됐다는 생각을 했다. 자꾸만 공부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고, 어머니마저 자신에게 존칭을 쓰는 고립감에 괴로워했다. 그저 동네의 신부로 살아가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을 꿈꿨다. 그래도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았으니 됐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전염병으로 죽고 나서, 새로운 주교가 부임하자마자 그의 존재는 까마득해져 버린다. 가족과 떨어지고 사랑 한 번 못해보고, 젊은 날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도 않고 착실히 살아온 결과가 ‘죽음 뒤 잊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온다. 한 청년의 청춘이 고작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체호프는 자신의 명성도 그렇게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슬퍼했겠지만, 나는 오늘 그의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다른 사람에게 추천까지 하고 있다. 때때로 인생은 자신의 생각보다 더욱 좋은 결말을 맞이하기도 한다. 우리가 주말을 침대에서 보내는 사이, 우리의 두려움보다 더욱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 상황 역시 종결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Ich ster-be.

죽음을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체호프는 ‘그리고...... 죽었다’라는 구절을 시그니쳐처럼 썼다. 그리고 자신이 실제로 죽을 때도 이런 말을 남겼다. ‘Ich sterbe’. ‘죽는다’는 뜻의 독일어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그의 소설 마지막 페이지처럼 그렇게 딱 한 구절만을 남기고 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소설으로 영생하는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졌다.


단편이라 술술 잘 읽히고, 부담스럽지 않은 길이에 입체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므로 지루할 틈이 없다. 토요일과 일요일. 단 이틀이면 체호프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무모한 생각일지는 몰라도 단편 소설을 써보고 싶은 생각이 아주 강렬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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