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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Oct 19. 2020

카뮈의 <페스트>에서 코로나를 읽다

소설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

오랑을 뒤덮은 쥐 떼,
전염병을 몰고 오다

프랑스의 작은 해안 도시 ‘오랑’. 느긋하고 여유로운 도시에 죽은 쥐의 사체가 하나 둘 늘어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의사 리유는 비틀거리다 축 늘어진 쥐 한 마리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경비원에게 가서 이야기 하지만, 경비원은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쥐의 사체가 두세 마리로 늘어났을 때, 곧이어 도시 전체가 쥐 사체로 뒤덮였을 때에야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보건 당국은 의사 협회의 자문을 얻어, 쥐들의 사체를 처리하고, 도시를 봉쇄한다. 시민들은 여전히 제한된 자유 속에서 일상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해변으로 나들이를 떠나고, 카페에서 커피를 즐겼다. 그러나 쥐들만 죽어나갈 때와는 달리, 몸에 멍울이 생기고 피를 토하며 죽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시민들에게 점점 더 강력한 제재가 가해졌다. 불상의 멍울이 생긴 확진자의 가족들이 격리되고, 사망자들의 시신은 한 구 씩 관에 모셔 ‘처리’되었다.


그런 멍울을 지닌 환자들은 도시 곳곳에서 속출했고, 리유를 비롯한 의사들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이 ‘그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페스트. 페스트가 다시 퍼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는 숨길 수 없는
전염병의 공포

 

상자로 실어 나르던 쥐들의 사체가, 한 트럭을 채우고도 넘칠 때, 사망자들을 처리하는 방식 역시 달라졌다. 더 이상 관을 수급할 수 없었기에, 성별만 나누어 무더기로 구덩이에 옮겨져 소각 처리됐다. 소각장의 연기는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초기에는 ‘누군가’의 불행일 뿐이었던 전염병이 ‘내 일’이 되고 나서야 시민들은 방구석으로 꽁꽁 숨어들기 시작했다. 서로를 의심하고, 미래를 잃어버리고, 연인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과 단절되고, 누군가는 영원한 이별을 하기도 했다. 그 시대 그 도시를 지배했던 것은 이별과 유배의 감정이었다. 무기력하고 우울한 시민들은 빨리 전염병의 시대가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된 페스트는 도시 변두리의 가난한 자들부터 집어삼켜 버렸다. 노동층이 사라지고 도시 전체의 경제가 흔들렸다. 극도의 불안과 우울로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퇴근 시간마다 쏟아져 나오는 젊은 연인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노인들은 전염병을 이길 여력이 없었다. 사망자 수가 늘어나고 재원 부족으로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기가 버거워졌고, 응급 환자들을 위한 병실의 자리 또한 남아나질 않았다. 매주 경기가 열렸던 축구장은 격리 수용소가 되고 말았다.


영원한 것은 없다


4월 16일에 시작된 이 무시무시한 전염병은, 12월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나 명절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나가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뉴스를 찾아보지 않게 되었고, 페스트만 끝나면 할 일들을 계획하며 잠시나마 행복에 젖었던 나날들은 과거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도시 곳곳에 영웅들은 있었다. 불철주야로 근무하는 의료진들, 그리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꾸린 보건대들, 도시 경계를 지키는 보초병들과 당국의 지시를 따르는 시민들. 모두들 함께 이 고난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겠다 싶을 때쯤, 회복하는 환자들이 늘어났고, 지난 4월 이래로 나오지 않았던 쥐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었다. 전염병의 매개체가 된다는 이유로 살처분되었던 개나 고양이들도 슬슬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전염병에 걸리지 않은 채로 살아 뛰어다니는 쥐, 그리고 그를 쫓는 고양이와 개들. 도시에는 희망이 찾아오고 있었다.


사망자 수는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도청은 결국 전염병이 종식됐다고 공식 발표를 했고,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승리를 만끽했다. 영화관과 카페들은 다시 영업을 하기 시작했고, 라디오, 신문사, 시민들의 환호 속에 도시는 개방되었다. 연인들은 재회했고 친구들을 제한 없이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오래간 보지 못했던 가족들과도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인내의 시간을 거쳐, 사람들은 감정의 분출과 기쁨이라는 보상을 얻게 되었다.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전염병의 시대,
코로나도 페스트처럼
과거가 될까.



이 모든 비극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마땅히 이상하게 여겨졌어야 할 쥐들의 사체, 그리고 완전히 사라졌다고 굳게 믿고 싶었던 페스트 의증을 가진 환자들, 전염병의 두려움보다 무서운 가난과 가난한 자들이 확진됨으로써 무너져 내릴 경제 체제... 미리 의심하고, 미리 처리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비극이었다.


전염병 시국을 인정하기 싫은 시민들은 당국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산으로 들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전염병을 가벼이 여김으로써 그 심각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확진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모두 합심해서 도시를 멈췄더라면 더 빨리 끝났을 비극의 시대는 소수의 이기심으로 한 층 연장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대를 종식시킨 것은 역시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목숨을 걸고 도시의 경계를 지키는 군인들, 심신의 한계치를 넘어서서 초인적인 힘으로 버텨주는 의료진들, 그리고 집 안에서 당국의 지시를 기다렸던 선한 시민들이 그러했다. 자발적으로 봉사를 결심한 보건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람들 덕분에 한 도시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페스트는 결국 그 기세를 꺾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말았고, 희생자들도 있었지만 시민 대다수가 살아남아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소설 <페스트> 속에서 코로나를 읽었다. 사람들의 우울과 절망, 그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는 양심과 정의, 불안과 두려움 사이에서 싹트는 희망 같은 것들은 페스트의 시대뿐만 아니라 코로나 시대에도 존재한다. 과거의 것들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면 코로나 또한 과거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전염병의 완벽한 종식이란 없다. 과거에 메르스였던 것이, 그리고 사스였던 것이 현실로 와 코로나가 된 것처럼, 코로나 역시 미래에도 다른 이름으로 사람들을 불안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페스트는 분명 과거의 이야기지만,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별과 유배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래서 소설은 시대의 거울이라고 하나 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집단의 이기심, 재원 부족으로 인한 의료 서비스의 어려움, 그리고 경제 침체까지 우리가 지금 직면한 모든 것들이 소설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아마도 소설 <페스트>에서 등장한 ‘승리의 환호성’ 역시 현실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꼭 <페스트>를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젠가는 전염병의 시대가 끝 날 것이라는 확신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도시 곳곳에 똬리를 틀고 조용히 숨 죽이다 언젠가는 또 도시를 덮치리라는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 시국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독자분들이 있다면, 카뮈의 <페스트>를 읽어 보라고 주저 없이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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