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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r 13. 2021

메인 요리, 그리스인 조르바가 끓인 콩 수프

그날의 재료에 삶이라는 조미료를 뿌려 뭉근하게 끓여 낸 소박한 저녁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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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공상하는 게 전부인 ‘나’, 직접 경험하여 쌓은 연륜으로 뭐든 척척 잘 해내는 ‘조르바’
조르바가 일하고 돌아와 그날그날 남는 재료를 몽땅 때려 넣고 끓인 콩 수프. 저녁을 함께 먹으며 그날 있었던 일로 수다를 떠는 삶
어쩌면 ‘기가 막힌 콩 수프’를 끓일 줄 안다는 조르바의 말에 흔쾌히 동업을 결심한 ‘나’는 책벌레와는 완전히 다른 조르바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바꿔 놓을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 아닐까
정해진 레시피대로 고급스럽게 차린 정찬보다 그날의 식재료에 이야기를 담아 끓인 콩 수프가 어떤 맛인지 궁금했을지도 모른다


조르바란 누구인가


“너는 내 운명”

“조르바는 누구인가”


니체는 말했다. 노래하고 춤추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적 인간이 되기를 꿈꾸라고. 내가 아는 한 그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조르바가 아닐까 싶다.


조르바는 산전수전 다 겪은 60대 노인이다. 이것저것 팔며 여기저기 돌아다닌 자유로운 방랑자다.


우연히 들은 산투르 소리가 듣기 좋아 결혼 자금을 몽땅 털어 악기를 사고, 그릇 만들기에 푹 빠져, 거슬린다는 이유로 검지 손가락을 자른 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을 했으니 된 거 아니냐며 남 얘기하듯 호탕히 웃어넘기는 그런 사람이다.


조르바는 낙천적인 캐릭터로 유명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비판적인 계획가이자, 부정적이고 예민한 구석이 있는 예술가다. 동시에 지독히도 현실적이다가도, 사랑에 빠지면 물불 안 가리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어떻게 한 가지 캐릭터로 그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리스인 조르바>는 화자인 ‘나’와 ‘조르바’라는 인물이 만나 겪게 되는 사건의 행적을 기록한 소설이다. 조르바가 아니라, 조르바와 ‘나’의 소설이다.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섬에서, 노동과 예술을 한 몸에 품고 있는 한 인간을 만나, 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피와 살로 배운 지혜를 배우는 ‘나’의 이야기다.


‘나’는 삼십 대까지 책상을 벗어난 적 없는 유학파 지식인이다. 반면에 조르바는 지성의 세례를 받지 못한 원시적인 인간. 그렇다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책벌레가 잡초 같은 남자 조르바와 어울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어떻게 조르바와 만났나

“극과 극의 두 사람 ‘조르바’와 ‘나’의 만남”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의 카페에서 대기하는 중, 우악스러운 뱃사람들 사이에서, 늙수그레하지만 건장한 덩치의 조르바가 단연 눈에 띈다.


비가 내리고, 어둡고, 바람 거센 항구에서 ‘나’는 우울하고 고독하여, 이별한 옛 친구와의 추억에 잠긴다.


때는 러시아 혁명. 신념을 같이 했던 친구는 홀로 카프카스로 갔다. 책벌레인 ‘나’와는 달리 전장으로 뛰어들어 동포를 구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진 ‘나’는 위선적인 책벌레의 삶에서 탈피하여, 행동하는 인생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그래서 항구로 온 것이다. 크레타섬의 폐광, 갈탄광을 빌려 책벌레가 아닌 노동자로서, 새 삶을 살고자 하는 ‘나’. 그런 와중에도 단테의 <신곡>을 챙겨 온, 여전히 책에서 위안을 얻는 책벌레다.


‘나’는 카페 한 구석에서 옛 친구의 기운을 내뿜는 60대 노인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노인은 ‘나’에게 다가와 행선지를 묻고는 대뜸 자기도 함께 가자고 하며, 무슨 일을 할 수 있냐 묻는 ‘나’에게 요리를 하겠다고 한다. 들어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수 있다며.


‘나’는 당당한 태도와 수프 이야기에 매료돼 그를 데려가 같이 일하기로 한다. 마치 신밧드처럼 세상을 많이 돌아다닌 느낌을 준 그 노인은 바로 조르바였다.


조르바와 ‘ 동행


“조르바의 춤”


조르바는 광산의 십장으로 일했다. 광맥을 찾고, 갱도를 파고, 고가 케이블을 구상했다. 모든 일은 마음먹은 즉시 열정을 갖고 행했다. 오르탕스 부인의 낡은 숙소에 머물며 식사를 대접받을 때면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나 진심으로 대했다. 일이 끝나면 해변의 오두막에서 ‘나’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면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런 조르바에게도 근심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갈탄광 사업이 부진하다는 점이었다. ‘나’는 조르바에게 갈탄 광은 명분일 뿐, 자신도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크레타 섬에 온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나’는 탄광 사업에 그리 간절하지 않으니, 조르바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다.


젊은이의 재산을 탕진할까 봐 밤낮으로 근심했던 조르바는 기뻐서 춤을 추었다. 갈탄광이 잘 되지 않는 것으로부터 생긴 근심에서 해방되어 얻은 자유를 춤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조르바는 세 살 난 아들 디미트리가 죽었을 때도 춤을 추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조르바를 보고 미쳤다고 수군댔으나, 그에게 춤은 슬픔이나 기쁨 등 감정을 표출하는 창구였다.


“조르바는 죽음에 침묵하지 않는다”


크레타 섬에서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은 사건은 두 가지다. 마을에 살던 과부 한 명이 마녀사냥을 당해 참수되었을 때, 그리고 오르탕스 부인의 임종 때다. 공교롭게도 모두 죽음에 관한 것이다.


마을 유지의 아들이 과부를 짝사랑했고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비관하여 자살을 하는 사건이 있은 뒤, 사람들은 과부에게 몰려가 돌을 던지고 때리고 욕을 했다. 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직접적인 손해를 볼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 하나 둘 몰려가서 욕하니 우르르 따라가 거든 것이다. 그때, 조르바만이 과부의 편을 들어주었다.


조르바는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는 것에 신물이 나 있었다. 조르바 역시 전쟁통에 누군가를 죽여봤고, 아무리 대의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렸기에 그 뒤로는 힘없고 약한 자들을 돕는데 발 벗고 나섰다. 아무리 선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악행은 악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홀로 목소리를 내고, 그 대가로 귀를 다쳐 피를 흘리는 동안 ‘나’는 비겁하게도 운명론 뒤로 숨었다. 과부의 죽음을 합리화하며 가식적인 위안을 얻었다.


‘나’ 역시 상황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감정이 격앙된 사람들을 상대로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희생을 했을 때 따라오는 보상이 무엇인지 계산했고, 타인의 시선과 이로 인해 겪게 될 불이익을 먼저 따졌기 때문이다.


오르탕스 부인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애도하기보다는 주인 잃은 물건들을 가져가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입으로는 만가를 부르면서, 눈으로는 쓸만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었다. 이런 사태에 대해 조르바만이 분노하고,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모든 것을 약탈당한 낡은 호텔에 덩그러니 남은 앵무새 한 마리가 고아가 된 채 구슬프게 울었고,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을 기리며 앵무새를 거두어 주었다.


생각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한 명분으로 크레타 섬의 광산을 사들인 ‘나’는 여전히 현실과 동떨어진 책벌레일 뿐이었다. 옛 친구는 동포를 구하러 전쟁터에 나가 신념을 증명하고 있을 때 ‘나’는 비겁하게 책 뒤에 숨어 있었다. 조르바가 반대파에 맞설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을 통해 보는 세상

“편지 안에 꼭꼭 눌러 담은 마음들”


조르바가 케이블 장비를 사러 시내로 나갈 때면 ‘나’는 허전함과 불안함을 느꼈다.  그런 감정의 변화를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우체부가 전해준 편지들 뿐이었다. 주로 그 편지들은 주로 ‘나’의 친구들로부터 온 것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었다. 일찍이 세계로 나가 지금은 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한 친구는 지금 속해있는 곳보다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친구가 전하는 아프리카에서의 즐거운 삶과 희망에 부푼 계획들로 인해 ‘나’는 당장에라도 기회의 땅으로 가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 대신 피로 물든 전장을 보여주는 친구도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동포들을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는 전사의 편지는 여전히 행동하지 않는 ‘나’를 향한 비판으로 가득했다.


‘나’의 오랜 옛 친구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무란, 동포들을 위해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친구의 눈에 비친 ‘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같은 신념을 가지고 열렬히 토론하다 한 친구는 전쟁터로 갔고, 한 친구는 책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옛 친구의 불편한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에도 없는 탄광 사업을 한답시고 크레타 섬으로 왔으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생각을 같이했던 친구도 변화시킬 수 없었던 ‘나’를 바꿔놓은 것은 조르바였다. 오랜 친구도 아니라 도망치듯 크레타 섬으로 향했던 그 날 만난 노인에게서 ‘나’는 이번엔 무엇을 보았을까.


바로 행동과 감정을 보았다. 정제되지 않고 곧장 흘러나오는 인간의 본능 말이다.


 조르바를 만나고 어떻게 달라졌나

“조르바가 바꿔놓은 ‘나’의 삶”


조르바는 말했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존재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에 있다고, 춤추고 노래하는 자유로운 삶은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닌 단지 오늘에만 존재한다고 말이다.


‘나’는 항상 주저했다. 논리, 도덕, 정직과 양심 등 삶의 껍질에 둘러싸여 행동과 감정이 배제된 공허한 삶을 살았다.


조르바는 ‘나’에게 책을 불태우라 말했다. 책은 삶에 대한 문제에 답을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춤을 추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복잡한 생각들로부터 해방된다고 했다.


유일하게 읽은 책이라고는 ‘신밧드의 모험’이 전부 인, 매일 삶의 껍질을 깨고 본능으로 직진하는 조르바. 그는 ‘나’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피와 살으로 경험해 왔다. 몸과 영혼이 조화를 이루고, 모든 생각으로부터 해방되어 기대도 두려움도 없이 자신을 비운 최후의 인간이었다. ‘나’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붓다였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책이 생명 없는 공허한 언어로 느껴져 읽기 싫어졌다. 그 대신 조르바가 가르쳐주는 춤을 따라 추고 전에 맛본 적 없는 자유를 느낀다. 감정을 표현하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법이 모두 그 춤 안에 있었다. ‘육신과 정신과 마음을 비워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진 깨달음이 있었다. ‘나’는 춤을 추고 나서야 비로소 최후의 인간이 될 수 있었다.


한 때 끓어오르지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하는 불능의 인간이었던 ‘나’는 조르바라는 생불을 만나고 나서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이다.


조르바가 끓인  수프

“콩껍질 같은 사회적 체면, 지식, 도덕, 양심.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들”


‘나’는 보통 쓰다만 원고를 붙잡고 있거나, 책을 읽거나, 옛 친구에게서 온 편지 같은 것을 읽으며 오후를 보냈다. 한 것 없이 머리는 복잡했고, 육체적 노동과도 견줄 수 있을 만큼 피로를 느꼈다. 때때로 우울했고 또 불안했다.


그런 ‘나’에게 하루 중 최고의 시간은 조르바와의 저녁식사였다. 정해진 레시피가 있는 게 아니라, 그날그날의 신선한 재료를 모두 섞어 넣고 뚝딱 끓여낸 콩 수프와 조르바가 들려주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있으면, 마음껏 웃고 떠들며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소박한 식탁은 종이와 잉크로 지어진 성 안에 칩거하는 ‘나’를 외부 세계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창구였다. 책상 위에서, 머릿속에서 그려보던 책 속의 세상이 아니라, 탄광에서, 시장에서, 낡은 호텔과 광장에서 직접 체험한 사건들은 식탁 위에서 훌륭한 조미료가 되었다.


조르바는 말했다. 먹는 것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타락한 수도원의 수도승은 술과 고기를 탐했지만 진실을 알리려 애썼고, 오르탕스 부인은 호화로운 식탁을 차리며,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했다. 그들은 진실을 알리는 사람이었고, 과거에 빠진 사람이었다. 조르바와 ‘나’는 콩 수프를 먹으며 오늘을 얘기했다. 그들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었다.


먹는 것은 삶의 연료다. 먹고 힘을 내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누군가는 회사를 다니고,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글을 쓰고 음악을 쓴다. 또 누군가는 밤의 소리에 이끌려 쾌락을 즐긴다.


우리가 밥 먹고 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을 말해준다. 지금 당장 자신이 무엇을 먹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답이 안 나온다면,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들을 행동으로 옮길 것. 그러면 당신은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된다. 하고 싶은 것은 미래의 공허한 꿈이나 소망이 아니라, 곧 실현될 또 다른 ‘나’의 모습인 것이다.


5 

“산투르를 켜는 부처, 조르바의 시대는 갔다”


아무리 긴 이야기에도 끝은 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크레타 섬에서의 나날들도 이제 결말로 치닫고 있었다.


조르바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케이블은 완공되어 개통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 역사적인 날을 기리기 위해 포도주와 양고기를 푸짐하게 준비했지만, 대망의 d-day, 케이블은 작동과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인부들과 구경꾼들이 도망가고, 먼지 가득한 현장에 ‘나’와 조르바만이 남았다. 둘은 태연히 앉아 음식을 먹었다. 쉴 새 없이 떠오르는 여러 생각을 떨치기에 술과 고기만 한 것이 있을까.


돈, 사람, 고가 케이블, 수레 등 모든 것이 떠나간 자리에서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배웠다. 모든 것을 잃었으니 무엇이 두려울쏘냐. 지켜야 할 체면도 없이 ‘나’는 모든 감정을 춤으로 풀어내며 숭고한 기쁨과 해방감을 느꼈다. 조르바가 아들을 앞세우고 펄떡거리며 춤을 췄던 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크레타 섬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케이블 공사에 썼던 모든 장비들을 조르바에게 넘겨주었고, 둘은 마지막 밤을 포도주로 보냈다. 조르바는 이별의 날, 모습을 감췄다. 크레타 섬에서의 긴 여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5년 후, 조르바는 여기저기 떠돌며 모험을 이어가다 류바라는 여자와 결혼도 하고 새로운 사업도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해외여행 중 대기근을 만나 독일에서 극빈한 생활을 하느라 조르바와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어느 날,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져, 마지막으로 조르바와 함께한 기억을 글로 옮겨 적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르바 연대기를 완고한 날, 부고를 한 통 받게 된다.


‘조르바는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감정 표현에 솔직했고, ‘나’를 생각했으며, 행복할 때만 연주할 수 있다는 산투르를 ‘나’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조르바는 죽는 날까지 ‘나’에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내라고 일러준 것이다.


“나이 든 피터팬, 조르바를 추억하며”


조르바는 무수히 많은 죽음들을 겪어 왔다. 그러나 정작 조르바가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아무리 감추려 해도 솟아 나오는 흰머리였다. 아무리 에너지가 넘쳐도 조르바는 65세 노인이었다. 어린 여자와 데이트를 하느라 물들인 검은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보일 나이였다.


조르바는 늙는 것을 아쉬워했다. 바로 행동에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을 곧바로 행동으로 표현해 왔던 그에게 나이 듦이란 사형선고와도 같았을 터.


유한한 젊음과 생명을 만끽하기 위해 그렇게 바람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녔던 것일까. 조르바는 순간의 쾌락을 신봉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에 존재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썼다. 조르바는 사랑을 먹고, 미움을 먹고, 죄책감을 먹었다. 철들지 않기 위해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거의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쾌락은 순수한 사람만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이었다. 수치심이란 게 생기면 쾌락 앞에 주저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인간을 감싸고 있는 껍질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책에서나 배울 수 있는 양심이나 도덕 같은 것. 그러나 조르바는 책이 아니라 인생에서 그런 것들을 배웠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삶의 껍질에 둘러싸이게 됐고, 흰머리가 부끄러워졌다.


거의 야생에 가까운 순수한 영혼을 가졌던 조르바는 서슴지 않고 쾌락을 좇아왔다. 노인이 되어 현명해지고 나서는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었다. 조르바가 피터팬의 네버랜드를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도 결국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를 거쳐간 수많은 여인들도, 그와 싸운 수많은 적들도, 그가 마시고 먹은 술과 음식들도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 벌써 수십 장은 넘어갔다. 이미 소설의 첫 등장에서부터 65세였던 조르바.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사람들에게도 그가 노인처럼 보일까? 책장을 넘기며 그의 순수의 시대를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조르바를 영원한 젊은 오빠로 기억하지 않을까.



*** 원문: 쾌락은 도덕의 반대편에 존재했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양심이나 도덕을 알게 되면 쾌락 이전에 수치심이 먼저 든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사람들만이 온전히 쾌락을 즐길 수 있다. 조르바는 거의 야생의 순수한 영혼을 가졌기에 평생을 쾌락을 좇으며 살아왔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경험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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