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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pr 18. 2021

디저트, 사랑이 듬뿍 담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요리 레시피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대하여



0. 메뉴 맛보기 “한 가족의 추억과 전통이 담긴 핫초코 한 잔
아무런 걱정 없이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한 번에 되살리는 마법의 초콜릿. 달콤 쌉싸름한 핫초코 한 잔에 곁들여 먹는 빵은 한 가족의 전통을 담고 있다. 집안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를 평생 부양해야 하는 티타에게도,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가 가문의 수치가 된 헤르트루디스에게도 여전히 잊지 못할 힐링푸드가 된 초콜릿. 헤르트루디스는 전쟁영웅이 되어 금의환향했지만 어머니는 이제 그곳에 없다. 평생 개인의 삶 없이 어머니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저주에 걸린 티타는 어머니가 사라진 후에도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한다. 인생은 달콤함과 씁쓸함이 뒤섞인 뜨거운 핫초코와도 같다. 불명예를 씻어버린 전쟁영웅에게도, 뒤늦게 자유를 찾은 로맨티시스트에게도 달콤하기만 한 초콜릿은 없다. 씁쓸한 맛없이는 초콜릿이 아니지.


요리와 사랑뿐인 티타의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체가 된 요리”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티타’라는 여성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티타가 태어날 때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고, 평생 사랑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게 된 남자가 자신의 언니와 결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티타의 삶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티타의 어머니 ‘엘레나’는 유독 티타에게 엄격했다. 엘레나가 세운 규칙을 어기거나, 실수라도 한 날이면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언어폭력에 티타의 마음은 멍들어 갔다. 아마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나차’가 없었더라면 티타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채 잊혀졌을 것이다.


나차는 글은 몰랐지만 요리에 밝았고, 티타를 사랑으로 감싸주었다. 자연히 티타는 부엌에 있는 시간이 늘었고, 나차의 요리법을 전수받은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나차가 죽고 나서는 집안의 요리사가 되었다.


티타는 나차의 가르침대로, 요리에 자신의 감정을 담았다. 통제되고 억압받는 엘레나의 농장에서, 요리는 유일하게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이었다.


막내딸이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티타에게는 공부를 하거나 결혼을 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오직 집안일과 요리만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런 티타에게 마치 ‘도넛을 튀기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첫사랑이 찾아왔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페드로’였다. 페드로 역시 티타를 사랑했기에 청혼을 하려 했으나, 엘레나는 티타 대신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하라고 억지를 썼다. 너무나도 완고한 엘레나 때문에, 페드로는 형부가 되어서라도 티타 곁에 남아야 겠다고 생각했고, 티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의 언니가 결혼하는 날 웨딩케이크를 만들어야 했다. 서러움에 복받친 티타의 눈물 젖은 크림은 하객들에게 그대로 전달됐고, 페드로와 로사우라의 결혼식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티타의 여자들


“가족보다 가까운 이웃”

티타의 희생으로 티타의 언니들은 사랑을 찾아 자유롭게 떠나갔다. 티타는 모두에게 주어진 사랑할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지만, 어머니의 농장에서는 어머니의 룰을 따라야 했다.


유년 시절,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았던 언니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사느라 막내 동생 티타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티타가 아니면, 온 집안의 살림과 요리, 어머니의 목욕물을 데우고 농장을 가꾸는 일을 누가 하겠는가. 아무도 고마워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티타의 가여운 삶은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티타는 언니들을 사랑했다. 사랑으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고, 집 나간 언니를 위해 몰래 옷가지들을 챙겨다 주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가로챈 언니에게마저 관대했다. 그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직접 받고 사랑으로 길러주었으니.


어머니는 항상 티타를 구박했지만, 티타는 잘하려고 애썼다. 한 번도 본분을 잊은 적 없이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냈다. 어머니가 강제로 티타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으려고 했을 때에도 입을 꾹 다물뿐, 어머니가 아프게 되자, 제일 먼저 달려가 병간호를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집 바깥의 여자들은 티타를 사랑으로 보듬어 주었다. 친구이자 엄마 같았던 나차, 살뜰히 티타를 챙겨준 첸차, 그리고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실어증까지 앓게 된 티타의 마음을 치유해준 ‘새벽빛’ 할머니까지.


티타는 집 바깥의 삶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했다. 티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티타의 남자들


“모 아니면 도, 끝나지 않는 사랑 게임”

티타는 왜 자신에게는 사랑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왜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러한 의문점은 “왜 페드로와 사랑할 수 없는지”로 국한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티타에게 청혼을 한 남자가 한 명 더 있었기 때문이다.


엘레나가 티타를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 했을 때, ‘존 브라운’이라는 의사가 티타를 집으로 데려가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그 덕분에 말을 잃었던 티타가 마음을 열고, 누군가를 위해 다시 요리할 수 있게 되었다. 존은 신혼 때 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를 못 잊고 5년을 혼자 살았다. 공허한 시간을 보내던 존 앞에 나타난 티타는 존에게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존은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속에 성냥 하나를 품고 태어난다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아마도 티타가 자신의 성냥에 불씨를 당겨줄 운명의 상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티타에게 청혼을 했다. 티타가 형부인 페드로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티타에게 줄 수 있는 경제적, 정서적 안정감에 대해 여러 번 얘기했다. 물론 티타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


티타는 존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그리고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페드로에게 더욱 끌렸다. 자신의 선택이 절망적인 결과를 낳을지라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첫사랑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을 테다. 그러나 첫사랑에 실패한 뒤 불행한 삶을 살게 된 티타는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내주는 좋은 남자의 청혼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티타와 아이들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것도 행복”

티타는 사랑하지 못할 운명으로 태어났다. 막내딸은 평생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집안의 전통 때문이었다. 어머니 엘레나는 티타 주변에 남자가 있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어차피 결혼을 못할 테니, 남자들과 시간을 보낼 바에야 집안일을 하나 더 배우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티타의 첫사랑인 페드로를 보란 듯이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시켜, 일말의 희망마저 꺾어 놓는다.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고, 어머니 시중을 드는 일 외에는 티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루하고 우울한 일상을 달래주는 것은 티타의 삶 속에 들어온 천사 같은 세 아이들 뿐이었다.


첫사랑의 실패로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티타의 마음을 녹인 아이, ‘로베르토’. 마음의 상처로 실어증까지 앓았던 티타가 아픈 와중에도 요리를 해주고 싶어 했던 아이, ‘알렉스’. 그리고 로베르토가 떠나간 자리에 다시 찾아와 준 희망의 천사, ‘에스페란사’.


이 세 아이들 덕분에 티타에게 허용되지 않은 ‘어머니’라는 역할을 간접적으로나마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티타는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사랑을 나누어 줄 상대가 없었더라면 아마 풍선처럼 터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페드로와의 못다 이룬 사랑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퍼져나갔다.


어머니를 부양하고, 언니들을 챙기고, 사람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동물들을 먹이고, 또 아이들을 돌보는 모든 것들이 사랑이었다.


그중에서도 세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는 가장 순수하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티타의 삶에 있어 크나 큰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아이들이라도 이럴진대, 티타의 어머니는 왜 그렇게 티타를 미워했을까.


! 어머니


“어머니도 사랑 앞에서는 여자”

어머니 엘레나는 티타와 페드로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일부러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와 페드로를 결혼시켰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페드로의 마음은 티타를 향했고, 이를 감지한 엘레나는 페드로 부부를 억지로 멀리 내보내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페드로의 아들 로베르토가 죽었고, 사랑하는 조카를 잃은 슬픔에 이성을 잃어버린 티타는 여태껏 쌓인 울분을 토해낸다. 어머니를 향한 첫 번째 반항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정신병원이나 가라는 소리뿐이었다. 티타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소박한 꿈을 꾸었을 뿐인데 어머니 엘레나는 앞장서서 딸의 인생을 망치려 했다.


그렇게 집을 나와 하루하루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어머니의 농장이 습격을 받아 어머니가 크게 다치는 일이 발생한다. 티타는 주저하지 않고 어머니를 도우러 가서, 정성껏 소꼬리 수프를 끓여 주지만 어머니는 매몰차게 거절한다.


“어머니 엘레나는 왜 그렇게 티타를 미워했을까.”

티타를 괴롭혀온 평생의 의문점은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풀리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항상 허리춤에 열쇠 꾸러미를 차고 다녔다. 수많은 열쇠 중 하나는, 어머니의 옷장 속 작은 함의 것이었다. 티타의 머릿속에 옷장 속에서 장난을 치다 호되게 혼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작은 함 속에는 편지들과 일기장이 들어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호세’라는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 한 묶음은 진심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젊은 연인들의 한 때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어머니의 가족들은 호세가 혼혈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결혼을 반대했고, 강제로 ‘후안’과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도 엘레나는 호세와 계속 만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니가 바로 헤르트루디스였다. 둘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습격을 당해 호세는 죽고 말았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티타가 태어난 날,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호세와 엘레나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떠들었고, 이를 들은 티타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조그만 아이 티타는 이 모든 미움과 원망을 한꺼번에 떠안고 말았다.


자신도 전통과 인습의 벽에 좌절했으면서, 또다시 막내딸 티타도 낡아빠진 전통에 가두어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마지막까지 딸에게 마음 주지 않고 떠난 어머니 엘레나. 단 한 번도 사랑을 보여주지 않고 떠난 어머니를 티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티타는 어머니를 이해하기로 했다. 사랑에 좌절한 한 여인을 향해 진심 어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신은 절대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재회한 페드로를 보고,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티타는 말버릇처럼 ‘어머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어머니의 죽음밖에 없다’고 되뇌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유령이 되어서까지 페드로와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페드로의 청혼을 받은 날, 엘레나의 농장이 불타 별이 되고 만 티타.


이렇게 될 것을 알았을까. 자신이 겪은 사랑이 상처뿐이라 막내딸의 사랑도 비극으로 막을 내릴까봐 그렇게 훼방을 놓았던 것일까. 아니면 티타와 페드로가 사랑하게 된 날, 기어이 자신의 농장을 불사를 정도로 그들의 행복을 막고 싶었던 것일까.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카카오 순도 100% 초콜릿”

아무 걱정 없었던 어린 시절. 언니들과 장난치고 떠들며 휴일이 되면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면서 올해는 또 어떤 선물을 받을까 기대감에 부풀어 잠들었던, 이제는 과거가 되어 버린 시간들.


다시는 올 수 없는 그 시간들을 곱씹으며 티타는 가만히 초콜릿을 빚었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자신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존 브라운 박사와 하나뿐인 첫사랑 페드로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다.


초콜릿은 달콤하고도 씁쓸했다. 갖가지 양면적인 요소로 가득 찬 인생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치들 중에서도 극단을 오가는 것들은 아주 많다. 사랑은 마음속 열정뿐만 아니라 미움, 질투, 증오까지 이끌어낸다. 전통은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오면서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을 남겨 주기도 하지만, 불합리한 악습까지 대물림하게 만든다.


티타의 삶 속에서도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존재했다. 진심을 다해 티타를 응원해주는 헤르트루디스 같은 언니가 있는가 하면, 첫사랑을 빼앗아가고도 충족되지 못한 사랑에 대한 원망을 동생에게 돌리는 로사우라같은 언니도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나차 같은 사람도 있고, 티타를 엄격한 규율 속에 가두어 쥐락펴락했던 엘레나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잊혀져 버리는 불꽃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요리책 안에서 영생하는 사람도 존재했다. 바로 티타였다.


티타의 요리책


“타이틀은 요리책, 알고 보면 사랑책”

페드로와 로사우라가 결혼을 한 뒤, 티타는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몸부림쳤다. 페드로는 사랑의 불꽃이 사그라들 때쯤 한 번씩 불을 지폈다. 그러나 그 작은 불꽃은 엘레나의 호통에 다시 작은 불씨로 변하곤 했다.


언젠가 페드로는 티타에게 장미 꽃다발을 선물했고, 당장 버리라는 엘레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티타는 그 장미를 메추리 요리에 곁들여 식사로 냈다. 완벽히 조리된 메추리 요리에 뿌려진 빨간 장미 꽃잎은 육감적이고도 관능적인 풍미를 더했다. 언제나처럼 요리는 요리사의 감정의 매개체였고,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요리사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페드로와 단 둘이 외딴곳으로 도망가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티타의 마음은 헤르투르디스를 자극하여 금지된 사랑으로 이끌었다.


혁명군 장교와 사랑에 빠져 그 길로 집을 떠나버린 헤르투르디스는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 어머니 엘레나는 헤르투르디스의 이름도 입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티타는 헤르투르디스가 떠난 날을 기려 매 해 메추리 요리를 접시에 올렸다. 그 날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날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자유를 되찾은 날이고, 어머니로부터 해방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티타는 요리책을 쓰기 시작했다. 단순히 요리 레시피만 적지 않고, 인생을 기록했다 - 메추리 요리 챕터의 말미에는 헤르투르디스가 이 요리를 먹고 집에서 도망쳤다고 썼다.


티타의 요리책은 생명력이 강했다. 엘레나의 농장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을 때 이 요리책 한 권 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주인 잃은 요리책은 조카 에스페란사의 손에 들려, 에스페란사의 딸에게로 전해져 내려왔다. 에스페란사의 딸은 어머니가 떠난 부엌에서 추억이 가득 담긴 크리스마스 파이를 구웠다. 어머니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어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파이 하나에 가득 들어 있었다. 함께 요리하며 에스페란사가 티타와 함께한 추억을 이야기해주었던 것처럼 이제 에스페란사의 딸은 그녀의 딸에게 티타와 에스페란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그 책은 또 누군가의 딸과 아들의 손에 맡겨지리라. 그리고 한 장 한 장에 사랑이 깃든 마법의 요리책을 보고 요리하며 추억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한 티타는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요리 레시피만큼이나 많은 사랑의 형태”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든 먹는다.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그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은 완벽하지 않으므로, 사랑에 빠지면 어딘가 부러지고 다쳐 삐걱거리게 된다.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도 삐걱거리는 사람들 천지다. 요리 문학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연애 소설 같은 느낌이다. 티타와 페드로의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부터, 혁명가들의 전쟁 같은 사랑, 보수적인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인종을 초월한 사랑 등 다양한 사랑의 형태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소설은 요리를 매개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앞서 요리 이야기는 실컷 했으니, 아쉬운 대로 마지막 장에서는 모두의 엇갈린 사랑에 대해서 간단히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이 여자들이 사랑하는 방법”

먼저 주인공 티타의 사랑 이야기부터 해볼까. 티타는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태어났다. 왠지 모르게 자신을 미워하는 것 같은 어머니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살림까지 도맡아 했다. 그런 티타 앞에 도넛 튀기듯 간질간질 한 첫사랑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가슴 설렜을까. 그러나 어머니가 강제로 첫사랑의 상대인 페드로를 언니 로사우라와 엮어 주었을 때, 티타는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의 의욕마저 잃은 티타 앞에 백마 탄 왕자님 존 브라운 박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존은 아내를 잃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는 싱글 대디였다. 의사란 직업을 가졌고, 성품도 넉넉하여 티타에게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존은 티타에게 청혼했지만 티타는 형부인 페드로에게 더욱 끌렸고, 오갈 데 없는 자신을 받아준 고마운 사람인 존에게 죄책감을 가졌다. 그래서 청혼을 거절하고, 먼길을 돌아 페드로와 사랑을 나누게 됐지만,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티타는 동년배의 여성들이 갈구하던 안정적인 가정이라는 가치보다, 자신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첫사랑과의 재회를 선택했다. 첫사랑에 두근거리던 사춘기 소녀에서 성장을 멈춰버린 순수한 사랑의 감정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리 안정적인 가정일지라도 사랑이 빠진 공허한 미래를 앞서 내다본 것일까. 어느 쪽이든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할 터. 어쨌든 티타의 사랑은 활활 타오르다 잿더미가 된 식은 불꽃으로 남고 말았다.


이성 관계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티타는 불행하기만 했을까. 다행히도 티타의 곁에는 티타를 친 딸처럼 아껴준 나차가 있었고, 그 덕분에 결핍된 애정을 어느 정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차 역시 옛사랑을 잃은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가 티타가 첫사랑을 빼앗기고 웨딩케이크를 만든 날, 눈물 섞인 크림을 맛보고는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와 옛사랑의 사진을 손에 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떤 사랑은 이별 후에도 계속된다. 행복했던 옛 추억을 잊지 못하고 곱씹으며 그리워한다. 그러다가 그 추억들이 절대로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깊은 절망에 빠진다. 나차가 손에 꼭 쥐고 있었던 옛사랑의 사진처럼, 이미 지나간 것이지만 버릴 수 없는 감정에 매달려 하루를, 1년을, 어쩌면 평생을 괴로움 속에 산다.


나차에게 사진 한 장이 남았다면 티타의 어머니 엘레나에겐 편지들과 일기장이 남았다. 엘레나가 사랑했던 호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엘레나의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했다. 가족들은 강제로 엘레나를 다른 사람과 결혼까지 시켰다. 그러나 엘레나와 호세의 사랑은 더욱 불타올라 헤르트루디스를 낳게 되었고, 둘은 야반도주하려다 실패했다. 좌절한 엘레나는 모든 것을 옷장 안 작은 함에 넣고 오랜 시간 꼭꼭 감추어 놓았다.


그러나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은 의외의 순간에 폭로되고 만다. 헤르트루디스가 혁명군의 장군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혼혈아라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티타가 어머니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어떤 사랑은 그 증거를 감추어야만 하고, 또 다른 사랑은 증거를 필요로 한다. 사랑하는 마음은 본능이라지만, 결혼은 사회적 계약이라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티타의 언니 로사우라의 소유하지 못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로사우라는 티타가 갖지 못한 것을 다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편 페드로의 사랑만은 가질 수 없었다. 티타의 첫사랑이었던 페드로와 결혼을 하고, 로베르토와 에스페란사를 낳았는데도 페드로의 눈은 항상 티타를 쫓았다.


티타는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와 결혼한 언니를 용서하지 못했고, 로사우라는 그래도 이제는 자신의 남편인데 아직도 페드로를 사랑하는 티타에게 화가 났다. 둘은 마주치면 싸웠다.


그나마 티타가 존 브라운 박사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 사이가 가장 좋았다. 티타는 존과 결혼하면 지긋지긋한 어머니의 농장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마음이 홀가분했고, 로사우라는 동생의 첫사랑과 결혼했다는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결국 티타의 파혼으로 짧은 평화는 끝이 났다.


그 뒤로도 두 자매는 에스페란사의 양육과 교육, 결혼 문제로 쉴 새 없이 싸웠다. 그때마다 승자는 티타였다. 이상하게도 죽을 때까지 로사우라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페드로와 결혼하고 로베르토와 에스페란사를 낳았는데도 말이다.


“에필로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장이 아니라 월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1월부터 12월까지, 총 열두 가지 요리의 레시피와 함께 티타와 주변 인물의 인생을 담고 있다. 읽다 보면 상세히 쓰여진 갖가지 식재료와 조리 방법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탓에 배가 고파온다. 사실 이 책은 <맛있는 소설들>을 구상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어떤 요리는 인물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소설이기 때문이다.


나차는 티타가 만든 케이크를 먹고 옛사랑이 그리워 울다 죽었고, 메추리 요리를 먹은 헤르트루디스는 혁명군 장군과 금지된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걱정 없던 시절, 한데 어울려 마셨던 따끈한 핫초코 한 잔은 티타와 자매들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었다.


작가는 왜 하필 요리와 사랑으로 책 속을 채웠을까. 책을 채워 줄 다른 가치들도 많은데 말이다. 여러 번 생각한 끝에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바로 요리와 사랑은 둘 다 주체적으로 수행할 때 만족도가 높아지는, 서로 상당히 닮은 구석이 많은 가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마음의 허기를 채우고, 요리는 육체의 허기를 채워준다. 요리 레시피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존재하고, 쓰고, 달고, 시고, 떫은 여러 가지 맛이 난다. 사랑과 요리는 비슷한 점이 많지만, 무한한 조합으로 새롭게 재탄생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손 끝에서 창조된다.


인간의 결핍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채워주는 요리와 사랑, 사랑과 요리. 작가는 이 오랜 전통을 가진 친숙한 두 가지 가치를 내세워,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 내려야 할 수많은 ‘선택’에 대해 이야기한다.


행복한 삶은 어머니가 내린 명령을 따른다고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 항상 행복으로 귀결되는 것 또한 아니다. 행복에 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타인의 손을 빌리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갈 때 그 과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결과가 나쁘더라도 스스로 결정한 선택이라면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 이미 절반의 행복은 손에 넣은 셈.


요리도 사랑도 남 탓할 것 없이 스스로 주도해 나간다면 망치더라도 문제 될 게 없다. 집안의 반대로 사랑하는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엘레나와, 어머니의 명령으로 동생의 첫사랑과 결혼한 로사우라를 보라.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에 대한 화풀이로 티타를 못살게 구는 대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렸더라면 힘들더라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을 텐데 말이다.


반대로 의사의 아내가 되는 것 대신 자신의 첫사랑과의 재회를 선택한 티타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꼈고, 어린 나이에 독립하여 혁명군과 사랑을 나눈 헤르트루디스 역시 안정된 결혼 생활과 함께 여장군이 되어 금의환향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요리들 중,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핫초코 한 잔이 있다. 조금만 물을 덜 넣어도, 혹은 더 부어도 어릴 적 그 맛을 살릴 수 없는 까다로운 음료다. 그 물은 자기가 부어봐야 안다. 많이 연습해 보고, 쓴 맛 단 맛을 질리도록 봐야 완벽한 한 잔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티타가 직접 쓴 사랑의 요리책을 손에 넣는다 할지라도,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책에 쓰여진 레시피를 토대로 여러 번 직접 요리를 해봐야 한다. 결국 요리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도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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