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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Oct 31. 2021

애피타이저, <북호텔>을 기리며

푸른 얼굴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아페리티프 한 잔

메뉴 맛보기. 아페리티프
낡은 호텔을 인수해 새로운 시작을 하는 중년의 부부, 지금 막 직업을 잃고 슬퍼하는 늙은 마부, 마음에 드는 이성과 데이트를 하고 싶은 청년,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이런저런 고민 없이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 싶은 사람들, 또다시 밤을 지새우고 살갗을 에는 새벽바람에 맞서야 하는 노동자들… 이들이 찾는 것은 술이다.
당장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긴 시간의 명상과 많은 돈을 들인 사치, 아주 먼 곳에 있는 오락 시설을 택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색색이 물든 술잔을 집어 든다.
북호텔 1층의 카페테라스에서, 익숙한 얼굴들로 북적이는 테이블 사이로 호텔 주인이 건네주는 아페리티프 한 잔은 개인 맞춤 서비스처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명약이나 다름없다. 상황을 고치기보다는 취해 잠드는 것이 더 쉽고 빠르기 때문에, 오늘도 서민들은 술을 찾는다.



모든 이들의 끝이자 시작, 북호텔
어느 날, 처남이 제안했다. “돈을 빌려줄 테니 숙박업을 시작해보라고.”

<북호텔>은 끝과 시작을 담고 있다. 마차꾼 일을 하던 에밀 르쿠브뢰르와 그의 아내 루이즈가 운하 옆 오래된 호텔을 인수받아 그간의 삶을 끝내고 새로이 호텔 주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꽤 성공한 상인인 처남이 돈을 빌려줄 테니 숙박업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을 때, 루이즈는 망설였지만 에밀은 어쩐지 자신감이 생겨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호텔을 경영하며 벌어들일 수익을 점쳐보았다. 루이즈 역시 점점 희망이 생겨 먼 훗날 백화점에서 비싼 옷을 고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됐다.

부부는 부동산 중개업자와 함께 북호텔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낡고 누추하지만 충분히 개선될 여지가 보이는 그곳에서, 옛 생활과는 이별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다짐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한 날, 부부는 간만에 아들을 데리고 외식을 하기로 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결국은 싸구려 식당으로 들어가 골 요리 세 개를 주문했다. 소박한 테이블이지만 마치 특별사면 날처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이 살고 있는 호텔. 투숙객들과 가정부들이 머물렀다 사라지는 공간을 지키고 있는 르쿠브뢰르 부부. 아이, 학생, 풋내기, 젊은이, 중년과 노년, 그리고 생명의 탄생과 죽음도 거쳐가는 이곳. <북호텔>에는 평범한 가정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견딜만한 가난’과 ‘우연하고도 작은 행운’같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북호텔에 거주하는 남녀노소의 희로애락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곳


북호텔은 사람 사는 곳이다. 그것도 자가 없는 설움을 안고 모여든 가난한 서민들의 보금자리다. 장기투숙객도 있지만 단기 투숙객들도 많다. 수많은 이름들이 쓰였다 지워졌다. 각기 다른 성별과 직업이 머물다 떠난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이곳에 누군가 살았다’라고 대표할 만한 인물을 특정하기에도 벅차다.

실제 작품 속에는 더욱 다양하고 입체적인 인물이 수도 없이 많이 등장하지만 일단 이 자리에서는 ‘남녀노소’라는 다소 진부한 기준에 따라 각각의 샘플을 뽑아 보았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에밀, 그 남자의 이야기”

예정에도 없이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한 중년 남성이 있다. 바로 북호텔의 새 주인 에밀 르쿠브뢰르다.

불안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인수한 호텔에서, 숙박비 잘 걷고 청소만 잘하면 될 줄 알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복병들에 속앓이 하는 날이 늘어난다.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권하는 진상 손님을 피해 물을 섞어 마시기도 하고, 툭하면 공석이 되는 호텔 청소부를 고용하는 문제나 좋아하지도 않는 카드놀이에 불려 가 거절도 못하고 예의상 몇 게임을 해야만 하는 등 이런저런 적성에 안 맞는 일로 고생을 하며 쪽잠마저도 설치고 만다.

르쿠브뢰르는 호텔을 인수하고 나서 꿈을 꿨다. 호텔이 대박 나서 증축을 하고, 호텔 지붕 꼭대기 층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 풍경에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길몽이었다. 에밀에게 북호텔은 꿈 그 자체였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응축해놓은 꿈의 궁전이었다.

시간이 나면 시내로 나가 사람을 구경하거나, 운하 건너편에서 홀로 조용히 북호텔을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내향적인 인간 에밀. 그러나 이제 북호텔은 꿈이 아니라 지독한 현실이 되었다. 일하다 지쳐 잠시 쉬며 운하를 따라 걷다가도 북호텔이 눈에 들어오면 화들짝 놀라 재빨리 복귀하곤 했다.

그는 일자리를 잃은 늙고 초라한 마부에게 연민을 느껴 술을 한 잔 대접하는 따듯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갓 낳은 아이를 잃고 방황하다 일에 소홀해진 청소부에게 단호히 해고 통보를 내린다. 강한 책임감이 압박처럼 느껴져도 가족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 성실히 삶을 살아나가는 전형적인 ‘아버지’상이다.


“르네, 그 여자의 이야기”

무작정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파리로 온 시골 아가씨, 르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일 구하기도 힘든 대도시에서 방 안에 틀어박혀 남자 친구가 퇴근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초반에는 공주처럼 떠받들어주던 남자 친구는 점점 마음이 식고, 경제적인 부담에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르네는 눈치가 보여 생활비를 스스로 벌기 위해 북호텔 청소일을 구했다. 번 돈을 생활비조로 남자 친구에게 모두 바쳤기에 다시 그의 마음을 얻게 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덜컥 아이까지 갖게 된 르네. 남자는 말도 없이 떠나버리고, 르네는 혼자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유모를 구해 아이를 맡긴 뒤 열심히 돈을 벌어 양육비로 부치며 보람을 느낀다. 아이의 이름은 자신을 떠난 남자 친구의 이름을 따서 ‘피에르’라고 지었다.

르네는 남자 친구의 마음을 사려고 청소일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돈을 번다. 정작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가끔 호텔 남자들과 데이트를 하며 화장을 하고 차려입는 것이 전부다.

유모에게 아이 양육비를 보내고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었던 르네는 여러 유혹을 떨치고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어느 날 아기가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은 후, 공허함 때문에 번 돈을 흥청망청 써버리고 만다. 문득 정신을 차렸지만 엉망이 된 삶의 패턴 때문에 청소 일에도 소홀해져 해고를 당하기에 이른다.

르네는 고아 출신이다. 평생 사랑의 허기에 시달렸다. 남자 친구도 아기도 그녀의 사랑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모두 떠나 버렸다. 이제 르네는 정처 없이 파리의 길 위를 걸으며 어디에 또 사랑을 쏟아부어야 할지 고민한다.


“드보르제, 그 노인의 이야기”

붉은 보르도 와인을 즐겨 마시는 노인, 테이블에 ‘보르도 와인 한 잔’을 놓고 고독을 씹고 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늙은 마부에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여 한숨을 쉬다 옆 테이블 젊은이들이 떠들썩하게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한 때 인쇄소에서 일했던 드보르제 영감은 잠시 옛 추억에 잠긴다. 점심을 빨리 먹고 담배를 피우며 동료들과 여자 얘기를 했던 시간들, 제대 후 아름다운 마르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보냈던 짧은 시절, 그리고 이내 가출해버린 마르쉘의 빈자리를 채워준 어머니에 대한 기억…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단골 식당의 과부 마리를 만나 어렵게 청혼을 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그 해에 장티푸스로 두 번째 아내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혼자가 된 드보르제는 여러 호텔을 전전하다 친절한 르쿠브뢰르 부부와 유쾌한 숙박인들 덕에 북호텔에 정착한다. 사람들은 드보르제가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지 않고 카드놀이에도 끼워주고, 인생 선배 대접을 해주었다. 또한 젊은 식자공들은 드보르제 영감에게 업무적인 조언도 청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영감은 이제 창고지기일 뿐. 3층 자신의 방에 올라가기도 힘에 부치고, 일을 잃으면 양로원 밖에 갈 곳이 없는 쓸쓸한 신세다.

결국엔 몸이 안 좋아 창고지기 일도 그만두고 낭테르의 양로원으로 들어가게 된 영감은 매달 첫 째 목요일 11시쯤 외출 시간을 얻어 북호텔로 온다.

그러나 이제 함께 카드놀이를 하던 친구들은 죽거나, 호텔을 떠났다. 친절한 르네도 없어진 북호텔. 쓸쓸한 노인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은 르쿠브뢰르 부부와 개 바두르뿐이다.

한 번은 영감이 병이 나 몇 달째 소식이 없었던 적도 있었다. 겨우 건강을 회복한 드보르제 영감은 마치 고향을 찾아가듯 북호텔로 향했다. 한참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 루이즈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영감은 기운 없이 졸았다. 그러다 갑자기 예전 방이 보고 싶어 져 3층 27호실로 향하는 드보르제 영감.

자신이 살던 때와 많이 달라져 실망한 영감에게 루이즈는 정성껏 따듯한 식사를 대접한다. 그리고 또 이번처럼 아프면 편지라도 보낼 수 있도록 10프랑을 쥐어주고, 음식 꾸러미도 두둑이 챙겨 옷 주머니에 넣어 준다. 드보르제 영감은 사랑을 얻어 양로원으로 돌아간다. 투숙객들에게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북호텔 안주인 루이즈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폴, 그 아이의 이야기”

매일 밤 부모님이 싸워대는 통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를 불안정한 환경에서 사는 아이. 바로 샤르돈로씨네 막내아들 폴의 이야기다. 마차꾼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가정부 일을 하는 어머니, 푸줏간에서 일하는 형과 함께 북호텔에 세 들어 산다. 폴은 심부름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따귀를 맞아도 사랑이 고파 다시 부모에게 달라붙는 측은한 아이다.

폴이 짝사랑하는 레몽드 누나는 형 가브리엘과 사귀는 사이다. 어느 한 군데 마음 둘 곳 없는 아이는 북호텔에서 무엇을 얻어 갈까.

폴의 어머니인 샤르돈로 부인은 도덕적 기준이 낮고 양심도 없다. 가정부일을 하면서 주인집의 물건을 훔쳐다 호텔 투숙객들에게 파는가 하면, 후에 북호텔에서도 일하게 되는데 설렁설렁 청소일을 하면서 투숙객들의 방을 제 방처럼 드나들기도 한다.

소설 속 가난의 울타리는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도덕, 비양심이 걸러지지 않고 아이 주변에 깔려있다. 이런 환경에서 아이가 무엇을 보고 배울까.

매일 저녁 술판이 벌어지고,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의 테이블에선 카드 게임이 성황이다. 폴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상이다.


아페리티프 한 잔에 거는 기대
오늘은 어제와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은 아페리티프 한 잔

<북호텔>에는 유독 술이 많이 등장한다. 기뻐서 한 잔, 슬퍼서 또 한 잔, 누군가를 축하하고 위로하면서 한 잔, 추우면 춥다고 더우면 덥다고 한 잔. 챕터마다 등장하는 술잔의 숫자를 세다가 잊어버렸다.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던가. 어느 시대나 서민의 삶은 서글프다. 지친 마음을 달래려 호화로운 사치를 부릴 여유 없는 서민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하루하루 버틴다.  

그러나 서민들의 아침을 여는 것도 아페리티프라는 사실. 한 발자국도 내딛기 싫은 혹한의 추위 앞에 대단한 위로보다 향긋한 식전주를 들이켜며, 새벽처럼 푸른 얼굴을 녹이는 노동자들을 보라. 별 것 아닌 것에서 받는 응원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힘이 크다.

르쿠브뢰르 부부가 호텔을 오픈했을 때 전주인으로부터 제일 처음 배운 것 역시 아페리티프 혼합 방식과 거품 없이 맥주를 따르는 법이었으니, <북호텔>에서 술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말 안 해도 다 알 것이다.

누군가는 술 마시는 사람들을 보고, 호텔방 전전하지 말고 차라리 술 마실 돈 아껴서 집을 사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술 한 잔이 그 사람들을 살리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살아보지도 않고서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살아가는 동안이야 어쨌건 만인은 죽음 앞에 평등한 것.

생명력 넘치는 운하, 그 주변에 위치한 호텔. 그곳에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방을 빌려 인생을 이어간다. 모두들 어떠한 계기로 기존의 삶을 끝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훌쩍 들어왔다 훌쩍 떠난다. 여기에선 실패가 그리 큰일이 아니다.

한 달 치 숙박료 내기도 팍팍했던 신혼부부는 돈을 모아 시내에 작은 집을 마련한다. 젊어서는 화려한 삶을 살았던 노인은 이제 창고지기 일로 겨우 양로원 신세를 면한다. 한 남자를 따라 파리로 온 시골 아가씨는 미혼모가 되어 호텔 청소부로 성실히 일한다.

아끼고 아껴서 집을 산 사람도 신분 상승은커녕 달라진 것 없는 일상에 실망하고, 양로원에 가기 싫어 아픈 다리를 끌고 창고로 출근하는 노인도, 책임져야 할 아이가 생긴 젊은 여인도 열심히는 살지만 서민이라는 미명 아래 삶의 여유를 찾기 힘들다. 이들 중 특히나 더 어려운 자들은 미래를 위해 푼돈을 저금하기보다는 당장의 시름을 잊게 해 줄 마법의 아페리티프나 한 잔 사 마시는 것이 삶의 낙이다.

미래를 꿈꾸는 것도 기반이 있어야 한다. 선택도 능력이 돼야 하는 것이다. 운하 흐르듯 이어 내려져 오는 직업과 신분과 가난이 사람들을 술주정뱅이로 만든다. 운하 옆 즐비하게 늘어선 낡은 호텔을 전전하던 누군가는 운하를 벗어나 보려다 완전히 운하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해마다 제마프 둑 근처에서 시신이 떠오르는 이유다.

누구나 처음엔 희망을 품지만, 그 모든 끝이 해피엔딩인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되는 것 없는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혹시나 좋은 일이 생길까 술 한 잔 기울이며 한 번 더 희망에 속아 보는 것뿐이다.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찾는 파라다이스, 그곳에는 술이 있다.

북호텔의 어머니, 루이즈의 이야기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그저 숙박 시설에 지나지 않았을 ‘북호텔’이란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 바로 루이즈였다. 오갈 데 없고 마음 둘 곳 없는 이들에게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었다. 북호텔에 머문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를 돌봐주고, 병자들을 챙기고 결국엔 죽음을 맞이한 쓸쓸한 이들 곁에 있어주었다. 루이즈는 마치 북호텔의 생과 사를 모두 관장하는 운명의 여신 같았다.

그녀의 특별한 점은 편견이 없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에 있었다. 여장을 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지 않고, 선뜻 자신의 프릴 달린 치마도 내어주었으며, 경찰의 눈을 피해 가명을 쓰면서 잠시 북호텔에 머물렀던 사상가의 연설을 가슴 깊이 경청하고, 무명 배우의 연극에 진심으로 감동해 박수를 쳤다. 북호텔에 머무는 동안은 모두가 똑같이 루이즈의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루이즈는 성녀가 아니다. 그 또한 고된 노동 끝에 멜로 소설을 보면서 쉬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 평범한 여자였고, 늑막염으로 몇 주간 일을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눈에 띄게 드러나는 자신의 빈자리에서 은근한 자랑 기를 내비치는 워커홀릭, 즉 노동에서 자존감을 키우는 어쩔 수 없는 서민이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이 오래된 습성 덕분에 낡은 호텔에 두 번째 황금기를 맞이했다. 부지런히 쓸고 닦았다. 아이를 키우는 마음으로 다 죽어가는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러는 사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안고 시작한 첫걸음은 점점 결승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원점으로”

완숙은 변혁으로 무너진다. 북호텔은 더 많은 수익을 안겨줄 모던 피혁에 지고 말았다. 루이즈는 좌절했다. 북호텔이 문을 닫으면 가게 주인인 자신들 뿐만 아니라 투숙객과 노동자들 모두 터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들이야 어딜 가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몇몇은 제 발로 떠나가고 몇몇은 길거리에 나앉았다. 한 때는 예순 명에 가까운 사람들로 북적였던 북호텔은 운하의 물줄기와 함께 떠내려가고 말았다.

북호텔이 허물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루이즈는 마치 자신의 젊은 날과, 순수한 열정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젊음이라는 터널을 지나 새 집으로 이사 간 르쿠브뢰르 부부는 어느새 연금수령자가 되었다. 어느 날 북호텔 주변의 부지를 사들여 넓게 짓는다는 모던 피혁의 공사현장을 구경간 노부부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 북호텔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씁쓸하지만 모든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북호텔에서 날아온 메시지
그래도 운하는 흐른다

호텔은 무너지고 그곳엔 모던 피혁 건물이 들어섰다. 많은 이들의 청춘이 깃든 북호텔은 쏜살같은 세월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호텔이 무너졌다고 해서 숙박인들의 삶도 끝난 것은 아니다. 그곳에 머물렀던 숙박인들은 저마다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모던 피혁에서 청춘을 바쳐 열심히 일할 젊은 노동자들도 이전에 이곳에 호텔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이렇듯 어디서 시작된지도 모르고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는 채 수많은 시간을 흘러온 운하처럼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생명의 줄기를 이어간다. 아무도 그 이유는 모른다. 그저 시작했기에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매 순간 시작은 두렵고도 설렌다. 끝은 후련하기도 하지만 아쉬움을 남긴다. 그러나 또 다른 시작이 있기에 살아있는 동안 완전한 끝이란 것은 없다. 모든 시작과 끝이 우리 삶의 일부요, 숙명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고, 수 없이 많은 시작과 끝을 경험한다.

고여있는 것은 시체와 쓰레기뿐, 나머지는 계속 흘러야 산다. 말하자면, 시작과 끝은 우리 삶의 원동력인 것이다.

인생은 북호텔처럼 북적이다가도 갑자기 허물어지는 것, 먼 훗날 떠올리면 신기루처럼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청춘 같은 것이다. 이 청춘의 단편은 때로는 북호텔으로, 때로는 모던 피혁으로 이름을 바꿔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또한 여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가도 훌쩍 저기로 떠나 새 삶을 살며 자연스레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운하는 모든 것을 감추고 고고하게 흐른다. 물밑에 무엇이 숨겨져 있든, 주변 건물이 허물어지든 생겨나든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의 시작과 끝을 재촉한다. 마치 떠밀려가듯 시작과 끝을 반복한다. 멈추고 싶어도 흐르는 운하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일단 태어나면 누구나 운명의 레이스를 시작해야만 한다. 이유도 자비도 없다. 그래서 무섭다. 그러나 못 달릴 이유도 없다. 달리다 보면 계절이 지나고, 강산도 바뀐다. 잘난 것 없는 삶일지라도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죽은 것보다 가치 있다.

<북호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 역시 화려하고 세련된 것은 아니지만 생명 자체로 존귀하다. 르네의 삶에서, 에밀의 삶에서, 드보르제 영감과 폴의 삶에서 독자들이 감동을 받고 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다.

가족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설렌 마음에 외식을 하러 나갔다가 결국 가장 싼 식당에 들어가 소박한 저녁식사를 했던 르쿠브뢰르네, 실수인 줄 알면서도 자꾸 타인에 기대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르네와 살아보겠다고 불편한 다리로 창고지기 일에 매달렸던 드보르제 영감, 매번 싸우고 욕을 하는 부모님이라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폴.

이들의 삶은 가난하고 배운 것 없어 운하의 밑바닥에서 구른다. 그러나 이들의 삶에도 시작과 끝은 있다. 남들이 열심히 달려간 흔적을 보고 비슷하게라도 따라서 뛴다. <북호텔>에서 전해 온 메시지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라는 것. 이유도 모르면서 열심히,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재밌게, 은근히 절박하게 말이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등장 인물도 많다. 여장을 하고 무도회에 가는 것을 즐기는 남자, 사상가, 애정 결핍으로 관계를 망가뜨리는 여자, 남의 일을 뺏고, 남에게 일을 뺏기는 사람, 외도를 저지르려고 방 한 칸을 빌리려다 루이즈에게 호되게 한 소리 들은 사람, 조용하고 비밀스러운 삶을 살지만 경찰이 몰래 찾아와 수색을 하고 가는 사람의 방 등등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지금 <북호텔>을 펼치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나의 삶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새벽같이 푸른 얼굴을 술 한잔으로 녹이고 출근을 하러 가는 노동자의 모습 또한 우리의 삶 아주 가까운데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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