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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알 Apr 21. 2023

[퇴사야사 08]잡매니저가 되다

사원이야기

취업과정은 이랬다

‘커리어컨설턴트’라는 공고를 보았던 날, 뭔가 두근거리는 맘으로 늦은 밤까지 지원서를 작성했다.

노력과 정성에 보상 받듯, 며칠 뒤 면접안내를 받았고 뛸 듯이 기뻤다.

마치 운명처럼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았다.

면접이 쉽지는 않았다.

여러 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집단면접을 보았고 총 3차례나 보았다.

그리고 만만치 않은 경쟁률을 뚫고 고대하고 바라던 합격 메일을 받았다.

직원수 200명 넘는 16년차 중견기업, 내가 바라던 조건이었다.


특히 사장님과의 최종면접은 참 인상적이었다.

지원을 하면서 인터넷을 통해서 보았던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것 같았다.

인자한 미소로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하는 성공한 기업가의 모습에 후광이 비췄다.

그 분이 치열한 취업시장에서 나를 구원해주는 은인이길 바라며 열심히 면접에 임했다.

‘저를 뽑아만 주시면 불철주야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눈으로 했다.


“여러분들, 청년 때에 꿈을 가져야합니다. 좋은 일로 뉴스에 나올 수 있는 인생이 됩시다.”

“우리는 사람에게 투자를 하는 곳입니다.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장님은 지방에서 상경하여 자수성가를 한 분이었다.

뭔가 삶의 깊이가 느껴졌고 존경스러웠다.

과연, 30년 뒤에 나도 성공하여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나는 당장 내 눈 일 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뭔가 까마득했다.

당장 취업에 성공해야만 30년 뒤도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회장의 눈에 들어 5명 중 1명이 될 수 있었다.



입사 첫 날


합격 통보 이후 몇 주간 집에서 대기를 했다.

재직 중이 아니었는데도 회사는 나를 바로 불러주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전화를 하면 곧 연락을 준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당연히 월급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1주가 가고 2주가 갔다.

혹시 입사가 취소되지는 않을까?  나를 잊은 것은 아닐까?

통보를 받은 후에 맘이 놓여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게 후회가 되려는 찰나, 드디어 연락이왔다.

3주하고도 3일이 지난 후였다.


통보를 받은 다음주 월요일, 고대하던 첫 출근을 했다.

안내받은 장소에는 어쩐지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환영회를 하는걸까? 아니면 잘못 찾아온걸까?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어이, 신입사원은 이쪽 뒤로 와서 앉아요.”

익숙한 목소리, 인사팀장이었다.

면접전형간 밝고 친숙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말투도 강압적이라는 표현에 더 가까웠다.

군대에서 많이 들어 익숙했다.

“넵! 알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군대 말투로 대답했다.

동시에 몸도 빠르게 반응하여 자리에 착석했다.


이윽고 전 직원이 모인 행사가 시작되었다.

알고보니 매월 초에 진행하는 조회 행사였다.

학교와 군대에서 했던 기억이 새록했다.

애국가로 시작해서 부서별 실적발표 등이 지나자 신입사원 소개 시간이 되었다.

예고없이 시작된 순서에 나는 6명의 동료들과 쭈뼛쭈뼛 단상에 올랐다.

당황한 맘에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생각나는 것은 나를 쳐다보고 있던 직원들의 얼굴 뿐이었다.

일부는 반가워했고, 일부는 귀찮아 보였으며, 일부는 가소로워(?)보였다.

그저 신입사원으로서 두려움과 긴장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



부서는 컸다

곧이어 행사가 끝났고 곧바로 내가 일할 부서로 갔다.

배치받은 곳은 콜센터를 운영하는 곳, 내가 할일은 ‘잡매니저’였다.

부서는 회사에서도 가장 큰 부서였다.

직원들이 참 많았다. 모두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은 ‘잡매니저’였다.

‘잡(Job)’ 매니저는 말 그대로 직업을 소개해주는 일을 한다.

그렇다고 직업상담사는 아니었다.

회사는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콜센터들을 대신 운영과고 관리했다.

주로 금융사나 카드사들이었다.

우리는 신용카드를 쓰면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대표번호로 전화를 한다.

그러면 몇 번의 절차를 거쳐(상담원 연결은 0번) 친절하고 상냥한 상담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당연히 그 상담원은 그 신용카드사의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문의도 하고 따지기도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회사끼리의 계약을 통한 업무 도급계약이다.

콜센터 직원은 소속은 우리 회사이지만, 고객사들의 업무를 대행한다.

마치 옆집아주머니가 우리집 전화를 대신 받아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난 그들의 업무를 도와주는 일을 했다.


컴퓨터가 있었다

이번엔 출근날부터 컴퓨터가 설치되어있었다.

이름표도 있었고 사원증도 있었다.

확실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에 감동스러웠다.

부서를 둘러보니 모두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반듯하게 차려입은 정장에 깔끔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큰 조직에서의 작은 톱니바퀴들 같았지만 그마저도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었다.

체계가 있는 곳에 들어와 안심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회사가 이끄는대로 열심히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계약서를 썼다

정규직이었다.

인턴이나 계약직은 아니었다.

다만, 다른 조건이 있었다.

수습이었다.

입사 후 3개월간은 수습기간이 설정이 되어 평가에 따라 정규전환이 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조건부 정규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0명 중 9명은 모두 수습기간을 무사히 통과한다는 부연설명이 있었다.

안도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수습기간동안에는 월급이 90%만 나온다고 했다.

계약연봉은 세전 2,300만원.

세금 떼고 수습조건을 적용하고 나니 입금되는 돈은 170만원 남짓이었다.

인턴생활 때 받았던 150만원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회사의 규모와 업력에 위안을 삼았다.

지금은 작고 소중하지만, 내 능력을 펼쳐서 몸값을 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력서를 보았다

나는 한 금융기관의 콜센터를 맡았다.

제일 먼저 주어진 일은 채용이었다.

상담원들을 뽑아야 한다고 했다.

채용사이트에 공고를 등록하고 지원자를 모았다.

적절한 이력서들을 추려서 센터장에게 전달을 하면 면접대상자를 선별해주었고,

면접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안내와 마무리를 잘 하면 되었다.

합격과 불합격통보도 내가 직접했다.

불과 몇 달전만 해도 구직을 하기 위한 면접자였는데 이젠 내가 면접을 안내하고 통보를 하고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성공한 기분이 들었고, 오만한 마음도 조금 들었다.

마치 구직자라는 계급에서 승급하여 신분이 바뀐 느낌이었다.


한 이력서를 보았다.

40대 후반의 한 남성지원자였다.

이력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흔히 알고있는 시중은행에서 부지점장까지 한 경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퇴직한 상태, 한 달전 나와 같은 백수였다.

어떤 사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경력을 가진 분께서 상담원을 지원했다.

마치 베테랑 투수가 신인드래프트에 나온 것 같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드래프트에 베테랑은 선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담원으로 면접의 기회조차 받지 못했다.

가정이 있다면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아이들이 있을 나이인데…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제 막 취업에 성공한 내가 벌써 단꿈에 젖어있었다.

회사에 들어온 것이 끝이 아니란 것을 잊었다.

고작 이제 신입사원인 내가 벌써 오만함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었다.

언제든 나의 능력과 효용이 다하면 도태되는 것이 경쟁시장이었고 회사였다.

나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냉정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취업을 했다고 동화는 끝난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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