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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알 Mar 31. 2023

[퇴사야사 02]26살 반, 백수가 되었다

백수이야기

26살 반, 백수가 되었다.

미국에서 터진 금융위기는 마치 질병처럼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사람들이 집을 사라고 대출을 많이 해줬다고 했다.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주다보니 나중엔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돈을 빌려줬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모아서 집을 샀다.

아들 이름으로, 아빠 이름으로, 심지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이름으로도 대출을 받았다.

그렇게 빌린 돈을 갚을 수 있을리 없었다.

은행이 빌려준 돈을 못 받으면 위기가 온다.

그 위기는 은행을 넘어 투자자들에게 퍼지고 네트워크를 혈관삼아 전 세계로 퍼진다.

로마 이후 초강대국이었던 미국경제의 영향력은 실로 컸다.

유럽, 아시아 할 것 없이 빨간불을 켜졌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업들은 위기에 앞다퉈 고용을 줄였고, 신입사원 고용을 가장 먼저 줄였다.

취업문이 한없이 좁아졌다.

2010년 여름은 내가 제대를 했던 해이댜.

헐리웃 영화나 봤지, 가본 적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덕분에 취업길이 막혔다.

어떤 회사에도 소속되지 못한 채 집에 돌아와야 했다.

26살 반에 나는 백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시도 때도 없이(밤낮 그리고 새벽까지) 울려대는 전화기를 부수고 싶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전역장은 국방부장관님이 ‘이제는 전화기를 꺼두셔도 좋습니다’라고 공식적으로 해준 말과 같았다.

핸드폰을 이틀간 꺼놓고 메어있던 고삐가 풀렸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진정한 자유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에 입학하여 휴학 한번하지 못하고 졸업했다.

남들은 해외여행을 다니던 방학에는 병영훈련을 가야했고 퇴소후에는 아르바이를 하거나 아버지의 공장일을 도와야했다.

대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군대에 입대했고, 2년간 밤낮없이 일했다.(훈련보다도 업무가 더 많았다.)

쉴 틈 없이 달려온 나는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있었다.

그런 나에게 취업난은 그럴 듯한 변명거리가 되었다.

딱히 내가 못나서 취업이 안되는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환경 탓이랴.

나와 같은 처지의 동기들이 많았던 것은 더욱 위안이 되었다.

나는 자의적인 백수가 아니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말을 되뇌었다.


일단 쉬기로놀기로 했으니, 밤낮 구분이 없었다.

옷도 사고, 컴퓨터도 샀다.

군에서 받은 월급과 퇴직금은 내 생활의 땔감이 되었다.

커피와 노트북이 있는 한 난 어디서는 행복했다.

낮에는 카페에서, 밤에는 헐리웃에서, 새벽에는 프리미어리그를 누볐다.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골을 넣던 시절이었다.

커피와 영화에서는 감성을, 축구에서는 야성을 쌓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 땔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나무를 해와야 하는 시기가 금방 다가왔다.

비어가는 땔감창고를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내가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면 1년 뒤에도 이 모습 그대로겠구나...'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를 갔고, 이후엔 군대를 갔다.

적당히 시키는대로 주어진 일을 완수하면 다음 단계가 예정이 되어있었다.게임을 처음 시작하면 가이드가 있는 것처럼 하나의 퀘스트를 깨면 바로 다음 스텝이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출석부에 이름이 있었고, 관물대에 이름이 붙어있었다.

굳이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어느 길로 가야할지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런데 그 튜토리얼이 이제는 끝난 것이다.

나를 위한 메뉴얼이나 시스템은 없었다.

내가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이제는 사냥터에 가서 먹이를 잡고, 던전에 가서 몬스터를 사냥해야 했다.

게다가 사냥터와 던전에는 수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다.

마을을 벗어날 시간이 된 것이다.

내 삶에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자유와 위기감을 그렇게 함께 찾아왔다.


동기를 만났다.

초록은 동색이라.

동기들은 처지가 비슷했다.

재빠르게 움직여 취업에 성공한 일부 부지런쟁이를 제외하고는 나와 같은 백수였다.

그들은 대부분 토익학원을 다니고 있었다.(나는 왜 안 껴줬나, 나쁜놈들)


토익이라...나는 영어가 싫었다.

영어를 하는 회사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동기에게 물었다.

"토익 공부 왜 하는거야?

"왜긴, 취업하려고 하지(당연한 걸 왜 묻냐)"

"취업은 어디로 할건대?"

"어디긴, 돈 많이 주고, 대기업에 들어가야지(그럼 목표가 중소기업이겠냐)"

"대기업가서 무슨 일 할건대?"

"시키는 거 해야지(그걸 내가 어떻게 정하냐)"

"그럼 20년 뒤에는 뭐 할거야?"

"뭐하긴, 회사에서 최대한 시키는 거 하고 버티고 있어야지(지금 뭐하러 고민하냐),

너도 빨리 공부해라. 정신차리고."

동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정할 수도 없었고, 기한을 정할 수도 없었다.

토익은 영어를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취업을 위한 최소조건이었다.

그리고 자랑할 만한 이름의 대기업에 들어가 부족하지 않은 연봉을 받는 것이 목표였다.

새로운 퀘스트가 시작된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퀘스트를 거절했다.

동기에게 그런 질문을 한 이유는 있었다.

군에서 24시간을 쉬지 않고 꼬박 일했던 경험이 있다.

일주일간 거의 1-2시간의 쪽잠만 자며 보고서를 만들었다.

삶은 깨졌고, 쉼은 없었다.

나와 함께 밤새 일을 하던 상관은 가정이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가 매일 저녁 아빠를 찾는 전화를 했으나, 늘 대답은 ‘먼저 자라’였다.(난 제발 집에 들어가주기를 바랬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다짐했다.

이렇게까지 일할 거라면 적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나에게 우선순위는 토익공부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던전에 나가기전에 용사가 될지, 법사가 될지 정도는 고르고 싶었다.

그런데 방법을 몰랐다.

주변에 물어볼 곳도 없었다.

학교나 학원에서도 한 번도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각종 학원광고와 부업알바 글이 나왔다.

막막했다.

도서관을 찾아가서 무작정 이 책 저 책을 읽었다.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수기들은 차라리 도움이 되었다.

그 중, 이런 문구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일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일단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으며, 성격상 아부를 잘 못한다.

고집이 있고, 정의롭지 못한 것을 싫어했다.

계산을 꼼꼼하게 하지 못하고 숫자에 약했다.(문과였다)

영어를 보면 울렁증이 일어서 한시간 이상 공부하기도 힘들었다.(고2까진 이과)

복잡하고 머리아픈 일은 싫어하고 도망치기도 한다.

아...회사가 나를 뽑을 이유가 1도 없구나...

장점도 한 번 생각해보았다.

내가 가진 지식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추진력과 에너지가 있다.

논리적이고 비판적 사고를 한다.(따지기 좋아하는 신입이라...)

딱히 신입으로 뽑을만한 장점은 아니었다.

머리가 아파졌다.

일단 미뤘다.

집에가서 축구나 영화를 봐야지.


조급해졌다.

부모님은 나에게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으셨다.

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남자 나이 26살에 용돈을 받아 쓸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평생 하시던 일을 정리하고, 전직을 준비하셨다.

아침 일찍 출근하시고, 퇴근 후엔 공부를 하셨다.

더 이상 다 큰 아들이 뒹굴거리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가 없았다.

일단 돈을 벌기로 했다. 알바를 찾았다.

운 좋게 아는 형님의 도움으로 사무보조 일을 구했다.

시급은 최저시급이었지만, 꿀알바였다.

맘씨 좋은 형님은 일도 적게 주었고,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난 적당히 농땡이도 치며 적당히만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정규직 제의를 받았다.

순간 왠 횡재냐 싶었지만, 거절했다.

연봉이 2,200만원 밖에 안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동기들처럼 연봉 3천만원 이상 받고싶었다.

결국 알바는 3개월만에 그만두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전역 후 5개월, 이룬 것은 없었고 잃은 돈은 많았다.

나와 같은 처지였던 동기들도 이제 슬슬 취업에 성공했다.

취업을 못한 나는 점점 패배자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묻지마식으로 무작정 지원을 했으나 면접까지 불러주지는 않았다.

지원동기가 없는데, 뽑힐 리 없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의식의 흐름대로.

가. 나는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나. 교육에 관심이 많다.(군대보직도 교육장교)

다. 교육대학원엘 가야하나?(아니다)

라. 교육제도를 설계하고 진행하는 것을 해보고 싶다.

마. 그런거 하면서 돈 버는 회사도 있을까?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기업교육 등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었다.

나는 지원서를 다시 쓰고 그런 기업들만 지원을 했다.

이름과 규모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게 더 중요했다.

마침내 한 기업에서 연락이 왔고, 떨리는 맘으로 면접을 봤다.

그리고 며칠 뒤 합격통보를 받았다.

기뻤다.

드디어 나도  출근 할 곳이 생겼다.

비록 남들이 다 아는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이 넓은 도시에 내 자리와 책상이 있을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남들처럼 나도 아침에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장소가 있는게 어디인가?!

부모님께도 기쁘게 말씀드리고 출근을 준비했다.


27살 1월,

사회인으로서 드디어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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