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세월
오래전 어느 날 책 좀 읽는다는 나에게 지척에 있는 친구가 물었다. #칼의노래 #현의노래 를 읽었냐고. 읽지 않았다고 했더니 어디 가서 책 좀 읽는다고 하지 말라 했다. 자존심이 상했던 나는 이 두 책을 통해 김훈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김훈은 나에게 펜으로 칼을 휘두르고, 음을 튕기는 무협지 속 작가같은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어느새 노작가가 되어버린 그의 산문집 <허송세월>은 많이 힘이 빠진 느낌이다. 근데 힘이 빠졌다고 해서 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무협지로 말하면 무당파의 태극권 같달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자연스러움 속에 날카로움이 있다. 그래서 김훈의 기존 작품들이 화산이나 곤륜이었다면 <허송세월>은 무당이다. 지금까지가 중원을 꿰차고 상승하는 ‘오름’에 느낌이었다면, <허송세월>은 문파를 이루고 시조가 된 김훈이 깨달음을 베푸는 ‘내림’의 느낌이다. 무당에 장삼봉이 있다면 일산에는 김훈이 있다. 이 느낌은 소싯적에 무협지 좀 읽은 독자라면 느낌적인 느낌으로 알 것이다.
이제는 죽음을 읊고 해를 쬐며 허송세월로 바쁘다는 김훈 작가의 또 다른 힘이 느껴지는 책이다. 집 앞에 있는 일산 호수공원을 자주 산책한다는 노작가를 우연히 한 번 마주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같이 원을 그리며 걸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이 책을 읽는 내내 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무협지가 떠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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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깜냥을 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말을 지껄였다. 깨달은 자들과 신념에 찬 자들의 고함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고, 중생의 말은 난세의 악다구니 속에 헝클어져서 중생들끼리 말하기가 더욱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