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가 된답니다
다사다난한 중국 생활의 서막이 오르고, 길도 잃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실 남편의 처지는 나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도보 5분 거리에 학교가 있었으며, 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다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학생들이 다 나서서 통역을 해 주는 등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나는 이제 우리 집 살림을 책임지는 주부였고, 주부는 참 필요한 게 많았다.
장도 봐야 하고, 생활에 필요한 이것 저것 물품들도 사야 했고, 은행 업무도 봐야 했고.. 그런데 중국어라곤 니 하오 밖에 모르는 나에겐 매일이 정말 큰 챌린지였다.
저번에 그렇게 길을 잃은 이후로는 항상 택시를 탈 때마다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네임카드를 두세장씩 챙겨서 다녔고, 보조배터리가 없으면 아예 택시를 타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에는 과일가게 밖에 없어서 야채 살 곳이 없어 고역이었는데 학생 하나가 우리 집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야채 파는 곳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중국은 구글 맵도 안 되고, 바이두라는 중국 지도를 써야 했는데 (한국으로 치면 카카오맵) 그 지도에 야채가게를 찍어 주면서 여기 가면 야채를 살 수 있다고 했다.
지도를 따라 가니 이렇게 생긴 번화가 비슷한게 나왔다.
심봤다!!
그 곳에는 맥도날드, kfc, 은행, 빵집, 채소가게, 슈퍼 등이 모두 있었고 여길 발견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때는 사진 속에 '맛사랑'이라는 한국 식당도 있었는데 정말 맛이 없던 한국 식당이었다. 솔직히 저기서 파는 건 한식이라 볼 수 없을 정도였음...
여튼 채소 가게는 건물 내부 후미진 곳에 숨어있어서 겨우 찾을 수 있었는데, 그 곳에 들어선 순간 생각보다 허름한 모습에 조금 충격을 받았다.
채소 가게 내부에는 이상한 썩은 듯한 냄새가 났고, 상인들은 나를 보자마자 빨간 바구니를 내밀며 얼른 야채를 담으라며 호객 행위를 했다.
고기 파는 곳도 있었는데, 고기는 덩어리 채 매대에 올라와 있었고 냉장 보관이 되어 있지도 않았다. 더 충격이었던 건, 고기 덩어리 위에 파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그 파리가 고기 위에 살포시 착지하자 가게 주인이 파리채를 휘둘러 챱!! 하고는 그 파리를 때려 잡더니.. 바둑돌 알까기 하듯 그 파리를 손가락으로 튕겨 내는 게 아닌가... ;;;;
그럼.. 그 파리가 방금 죽었던 그 고기는.. 과연 깨끗하냔 말이다 ㅜㅜㅜㅜ 누구 입에 들어가게 될지...;;;
물고기를 파는 곳에서는 자라와 개구리도 팔고 있었다.
나는 충격에 휩싸여 그 곳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으나 내 코가 석 자라 야채를 사야만 했다.
주변을 잘 둘러보니 사람들이 유독 많은 가게가 있어서 나도 거기 가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유심히 살펴보니, 주인에게 바구니를 하나씩 받아 들고 원하는 야채를 골라서 바구니에 원하는 개수만큼 이것저것 담는 것 같았다.
나도 똑같이 당근, 고추, 감자, 양파 등을 한두개씩 골라 바구니에 담아 건네니 각각 무게를 달아 계산하더니 비닐 봉지에 담아 준다. 저울에 무게와 가격이 표시 되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었다. 가게 아주머니는 사지도 않은 쪽파 반 단 정도를 서비스로 얹어 주셨다.
뜻하지 않은 서비스에 기분이 좋아져 옆에 있는 과일가게도 기웃거려 보았다. 딸기가 나오고 있어서 그 가게에서는 딸기 시식회를 열고 있었는데, 딸기 한 알을 먹었는데 너무 달고 부드러워서 사야겠다 싶었다. 역시나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니 아주머니가 플라스틱 바구니를 주셨는데, 딸기도 이 바구니에 몇 알씩 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딸기는 개수가 많아서 너무 손이 많이 갈 텐데, 싶었지만 시스템이 다 똑같겠지 싶어서 10알 정도를 담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바구니를 뺏아 들고 딸기를 다른 투명한 케이스에 옮겨 담더니 막 뭐라뭐라 말씀 하시는게 아닌가.
나는 계속 웃기만 했는데 아주머니는 계속 내게 뭔가를 물어보셨다.
지금에 와서야 딸기는 투명한 케이스 (한 팩) 단위로 판매 하는 거였고 아주머니는 내게 몇 팩을 살꺼냐 물어본 거란 걸 알지만 그때는 알아들을 리가 만무했다.
자꾸 웃고 있자 아주머니는 더 큰소리로 막 물어보셨고, 나는 의기소침해져 겨우 한 마디를 했다.
-팅부동....
이건 중국에서 제일 유용했던 한 마디인데, 팅=듣다, 부=아니다, 동=이해하다.
<들어도 이해하지 못해요 = 중국어 못해요> 라는 뜻의 중국어이다.
내 팅부동..을 들은 아주머니는 놀란 눈치였다.
-팅부동???????
아주머니는 더 큰 목소리로 팅부동?? 이라고 외치시더니,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신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막 만지시더니 한자가 몇개 쓰인 화면을 내게 보여주시는게 아닌가.
그런데 한자인들 내가 읽을 리 만무하잖아???
당황해서 아주머니를 쳐다보자 갑자기 과장 된 표정을 지으시더니 마구 손짓 발짓을 하신다. 자꾸 내 귀를 가리키고 도리도리 고개도 저었다가 핸드폰을 자꾸 보여주시며 음, 음, 음, 이런 소리를 내시는 아주머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하는 생각이 들다가 갑자기 뭔가 번개를 맞은 것 처럼 깨달음이 왔다.
아.... 이 분..
나를 귀가 안들리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으시구나....
지금이야 그 동네가 정말 많이 발전되고 한국인 유학생도 많아서 외국인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유학생도 많이 없고 한국 사람도 정말 많이 없어서 아마 아주머니는 나를 귀 안들리는 중국 사람으로 생각 하셨던 것 같다.
순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여기서는 말을 못하면.. 귀머거리 벙어리구나..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너무 상황이 민망해서 이대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주머니께 비장의 한 마디를 건넸다.
-한궈런!!!!!!!!
그러자 아주머니가 이런,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하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아, 니쓰한궈런마!!! (어머 한국인이여???)
하며 신기해 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아주머니는 옆에 서 있던 고객들과 옆집 가게 아주머니까지 불러모아서 여기 봐봐 한국인이래~~하고 오지랖을 떨기 시작하셨고 나는 더 민망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어떤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살살 만지면서 피부가 좋다며 화장품 뭐 쓰냐고까지 물어보셨다... (중국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주머니가 손짓 발짓으로 화장하는 흉내를 내셔서 대충 눈치로 판단) 어떤 아주머니는 옆에서 안녕!!~~ 습니다~~~ 습니다~~~ 하는 요상한 한국어까지 시작하셨고..
결국 나는 큰 맘을 먹고 딸기를 포기하고 그 곳을 탈출했다.
야채가게를 나오는 그 순간까지 모든 상인이 나만 쳐다보는 진기한 경험을 하면서..
양파와 감자 산 걸 들고 집까지 걸어오는데 망할 야채는 무겁기만 하고, 3월 초의 꽃샘추위는 참 독했고.. 내 마음도 시렸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집에 와서 퇴근한 남편과 저녁을 먹고, 남편에게 당장 통번역 학과 교수님께 연락해서 똑똑한 학생을 찾아 중국어 과외를 구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는 중국말을 해야 살아갈 수 있겠구나.
중국어를 배워야겠다, 정말 큰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