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온 지 얼마 안 된 통번역 교수님은 아직 학기 초라 누가 똑똑한지 누굴 추천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약간 과외 선생님 찾는데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남편이 강력하게 그 반에서 그냥 제일 영어 잘하는 학생에게 물어봐 달라고 주장해서 나는 에이프럴이라는 어여쁜 중국 학생과 매칭이 되었다.
그때 과외비를 얼마 책정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호주와 중국의 중간 정도로 시간당 만오천원-이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대망의 첫 수업 시간.
나는 한달 치 과외비를 선불로 준비하고 에이프럴을 우리 집에서 만났다.
역시 통번역학과 학생이라 그런지 영어도 너무 잘하고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어서 굉장히 편했다.
내가 제일 처음으로 배우고 싶었던 건, 택시를 탔을 때 우리집에 돌아오는 주소 말하기였다.
내 머릿속에 우리 집 주소가 있다면 휴대폰이 천번 만번 꺼진다 한들 그깟 것이 나의 귀가를 방해할 수 없으렸다!!!
에이프럴에게 우리 집 주소를 보여주고 어떻게 하면 택시를 타고 여기로 돌아올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에이프럴은 우리 아파트가 중국어로 <커옌꽁위> 라며 이건 아파트 이름 치고는 약간 독특하다며, 직역하자면 연구 아파트? 뭐 그런 그런 이름이라고 했다.
아파트 이름 커옌꽁위, 커옌꽁위... 에이프럴의 발음을 녹음까지 하며 아파트 이름과 우리 아파트의 주소를 외웠다.
우리 아파트의 주소: 린첸지 산로우로우하오 (린첸지 366호) 커옌꽁위
린~치엔~지~ 싼~ 로우 ! 로우! 하오, 커, 예엔~꽁~위!!!
중국어는 성조가 아주 중요하므로, 에이프럴이 천천히 발음 해 주는 걸 여러 번 녹음해서 반복해서 들으면서 죽도록 외웠다. 첫 날이니 욕심내지 않고 저것만 주구장창 팠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택시 기사님이 취날리? (어디가) 라고 하면
린첸지 싼로우로우하오 커옌꽁위!!!!!!!!!!!!!!!!
라고 대답 할 수 있도록....
에이프럴에게 여러 번 발음 교정도 받고 집 주소와 내 이름 석자를 중국어로 외우고 나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린췐지~ 싼로우로우하오~ 커옌꽁위~를 외치고 다니자 남편도 내 억양이 완전 원어민이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음, 왠지, 아주 중국어를 잘하는 중국어 고수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집에 오는 길도 알겠다, 택시 타기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가는 길에는 목적지를 사진 찍어 놨다가 기사님께 보여주면 되었고, (이때 핸드폰이 안 켜진다면 그냥 택시를 안 타고 집에 돌아오면 됨ㅋㅋㅋ) 올 때는 멍청한 폰이 갑자기 꺼진다 하더라도.. 세상에.. 우리 집 주소는 내 머릿속에 있는 걸...????
정말 하나도 걱정 할 필요가 없었다.
이틀에 걸쳐 주소를 달달 외우고 나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신나게 택시를 타고 근처 백화점에 놀러가 이것 저것 장을 봤다. 전에 사지 못해서 며칠 내내 생각나던 딸기도 샀는데, 딸기가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장 본 딸기를 씻지도 않고 오물오물 먹어대며, 당당하게 택시에 올랐다.
훗...
나 집 주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야.
택시를 타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기사님은 어디가냐 물어보았고 나는 당당하게 앵무새처럼 내가 외운 주소를 늘어놓았다.
-린첸지 싼로우로우하오 커옌꽁위!!!
내 머릿속 시나리오에선 ... 기사님이... 바로 알아듣고 촥~ 멋있게 출발을 했어야 하는데... 삶이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곧바로 출발하기는 커녕... 기사님은 인상을 팍 쓰시면서.. 뒤를 돌아보면서..
에???어디라고????? 라고 되물으시는게 아닌가....
음... 하지만 내 성조와 발음은 완벽하다구!!!!! 난 다시 한번 당당하게
-린췐지 싼로우로우하오 커옌꽁위!!!!!!!
를 외쳤지만 기사님은 여전히 모르시는 눈치였다 ㅠㅠㅠㅠ 아.. 이런 시련이....
다행히 핸드폰이 켜져 있어서 사진 찍어놓은 네임 카드를 보여주면 되었지만 (그 주소엔 간략한 약도도 나와 있었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가 이거 말 하려고 과외까지 했는데,.... 뭔가 억울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주소를 외친다는게.... 그만... 내 입에서 나온 건 쌩뚱맞은 단어였다.
-똥난따쉐!!!~~~~~~~~~ (동남대학)
그러자 기사님은 두번 묻지도 않고 차를 출발하시는게 아닌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망할 동남대학....;;;;; ㅋㅋㅋㅋ
아니.. 이러려고 돈 내고 배운 게 아닙니다만.....;; 게다가 한번에 알아듣고 가시는 건 또 뭐람 ㅠㅠㅋㅋㅋㅋㅋ 동남대학의 저주가 내게 내린 기분이었다.
기사님은 나를 집 근처의 동남대학 앞에 내려줬고, 나는 또 그 무거운 짐을 들고 800미터 넘는 거리를 찬바람 맞아가며 걸어와야 했다. 겁나 무거운 비닐봉지에 손끝은 아려왔고 그 손끝은 또 칼바람에 얼어 감각이 없어져 버렸다.
뭐가 잘못된거야. 도대체... 망할.... 똥난따쉐........
과외는 1주일에 한번만 하기로 한 터라 다음 과외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너무 궁금한데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답답하던 찰나에, 남편이 자기 연구실에 반장을 뽑았다면서 그 반장과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반장의 이름은 후아 동셩. 줄여서 그냥 후아라고 불러 달란다.
뭔가 영어도 더듬더듬 잘 못하지만, 허허~ 하며 웃는 얼굴의 인상 좋은 남학생이었다.
그 학생과 밥을 먹으며 우리 집 주소를 보여주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냐고 하니까 그 학생이 내 발음과 성조는 너무 정확하단다. 그도 그럴 것이 녹음을 천번 듣고 연습한거란 말야 ㅠㅠㅠㅠ
하지만 문제는...
쑤저우가 너무 크기 때문에 택시기사들은 아파트 이름을 하나하나 다 모를 뿐더러, 커옌공위는 너무 작은 단지의 아파트라 그 이름을 듣고 이 아파트가 어딘 지 아는게 더 이상하단다. 게다가 택시를 타서 주소를 말하며 가 달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서울에서 택시를 타도 강남대로 올림픽대로 이런 대로가 아닌 이상.. 무슨 새빛로 300번지요 하면 누가 거길 알까??? 아파트 단지도 마찬가지다. 어디 근처의 어디 아파트요 해야지 갑자기 로얄한신아파트요. 이러면 거길 어떻게 알까??
듣고 보니 후아 말이 너무 일리가 있었다.
그럼 후아야.. 우리 아파트 올려면 어떻게 해야 해? 하니까 후아가 약도를 그리더니 설명을 해 줬다.
지도를 중심으로... 중국은 무슨 번화가를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단다.
내가 전에 야채를 사러 갔던 곳은 원싱광장.
우리 집이 있는 곳은 원휘광장.
그리고 우리 집 옆에 또 다른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은 원추이 광장이란다.
이제 나는 원휘광장을 외우면 되는데, 간혹 기사님들이 근처의 원싱광장과 원추이 광장을 많이 헷갈려 하니까 꼭 원휘광장을 정확히 외우란다.
만약 기사님이 잘못 듣고 원싱광장? 이나 원추이광장? 이라고 하면
부쒸!!! (아니에요)
원휘광장!!!
이렇게 대답하면 된단다.
오오.. 아주 그럴듯한 말이었다. 반장은 영어가 너무 기초라 이 모든 말을 아주 더듬거리면서 설명해 줘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다 듣고 나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후아도 역시 내 폰에 대고
원휘광장, 원싱광장, 원추이광장, 부쒸!!!! 등을 여러 번 녹음 해 주었다.
배운 건 당장에 써 먹어야지.
집에 가면서 셋이서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어디가냐고 묻자 후아에게 내가 대답한다고 하고는 자신있게 원휘광장을 외쳤다.
기사님은 두번 묻지도 않고 바로 차를 출발했다.
어머 세상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나는 비싼 과외비를 지불 중인.... 나의 과외 선생님께 약간의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