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
이 영화도 예전부터 빚처럼 쌓아놓고 있던 영화인데, 왜 피해왔는지 내 무의식은 알고 있었던 거다
차분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영화였다 내용이 어려운 것 같은 영화들은 거기서 뭐라도 의미를 추출해 내야만 하지 않나 강박을 가지게 되기도 하기 때문에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지구 여러 곳에 갑자기 동시에 출몰한 외계인의 우주선. 돌덩이가 서 있는 듯한 모양인데 몬태나의 배경과 어우러진 풍경이 멋있었다 막연하게 갖게 된 기대를 충족시켜준 등장이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서있기만 하니 인간들은 더 당황하고 어떻게든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려 애쓴다
언어학자인 루이스는 출중한 능력으로 인해 그 현장으로 거의 끌려가는데 자신도 흥미를 느끼기 때문인지 가고 싶어하는 태도였다 하긴 외계인을 만나 언어를 해독할 기회인데 목숨을 걸라해도 갈 거 같긴하다
영화 초반에 딸을 얻어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병으로 딸을 잃는 모습이 나오는데 외계인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계속 딸과의 기억이 등장하길래 딸을 제대로 떠나보내기 위한 위로의 과정인가 했다 그래서 그래비티가 생각났다 정말 많이 기대했던 영화였는데 지구 언저리에서만 머물다 지구에서의 삶에 대한 위로를 우주에서의 생고생으로부터 받아내는게 그때는 좀 싱겁게 느껴졌었다 포스터의 기운부터 우주의 비밀이라도 대놓고 밝히거나 우주에서 인간의 역경이 모험처럼 그려지나 기대가 컸어서 보고나니 좀 서운함이 들었었다 한참 후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선 문득 그래비티가 좋은 영화라는 울림이 왔다 인터스텔라가 나빴던 건 아닌데 결론이 다른 게 아니면서 과정이 너무 요란하지 않은가 했었다 스티븐 호킹이 그랬나, 인간에게 우주가 의미있는 건 사랑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물론 인간의 삶에 비추어 당연한 소리겠지만 그렇게 결론지어버리면 과학의 관점에선 전혀 관심이 가지지가 않는다고. 우주는 그냥 내 안에 있는 내 삶의 공간인가보다 해버리게 되지 하긴 인간이 각자 자기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도 모르겠는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결론은 아니었다 원작이 sf 소설이니 더 그랬겠지만 우주의 언어와 시간 문제에 대해 다룬다 언어학은 문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다 그건 거의 수학에 가까우며 문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언어학은 문학의 영역에서 다뤄질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인간과 외계인의 소통은 막연하게 외계인의 뛰어난 기술을 통해 인간의 뇌로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형태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인식과 교육과 소통의 과정은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위주의 사고란 생각이 들었다
음성을 뛰어넘어 상형문자 같은 형태를 서로 익히며 대화하는데 외계인의 언어를 알게 되면서 그들의 방식으로 사고가 가능해진 루이스는 그들의 시간개념을 습득했기 때문에 미래를 보는 무기를 갖게 된다 외계인들의 갑작스러운 지구방문의 목적은 3천년 후에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이유였다 우주에서의 3천년은 기나긴 시간도 아닐 것이다 3천광년 별은 뭐 들어본 기억이 없다 기본이 억단위로 시작하던데. 그때 자신들의 위기를 미리 알고 자신들을 돕고 화합해 줄 존재들을 찾아보러 온 거라고 볼 수 있다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서 그저 나중에 나 좀 도와줘 이 말 알아듣는 사람? 이런 거라서 지구인들은 그들과의 소통에 앞서 화를 낸다 자기들끼리 불확실한 공포에 질려 죽겠다고 난리를 치고. 그와중에 세계에서 가장 깡패같은 이미지를 가진건지 중국이 가장 먼저 그들을 쳐내겠다고 위협적으로 나온다 루이스의 현재는 과거에서 끌어와서 이미 겪었던 미래를 이루어낸다 혼자 외계인의 언어를 익혀서 자신도 뭔지 모를 과거이자 미래를 동시에 오가면서 결국 혼자 해결.
늘 삶이 원형의 반복이 아닐까 여겨왔는데 지금도 모두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뿐 이미 겪었던 일, 알고 있던 일을 다시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 자체가 과거와 미래를 왔다갔다하며 태어나고 죽는 반복이 아닐까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인과의 흐름 속에 산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삶은 목적론적 인식하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잠깐일지라도 인식의 변화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좋은 영화였다
혼란의 시기에 어디에나 있는 현실에 심취한 한심한 군인의 폭탄에 외계인이 죽는 걸 보니 중국이 택한 길이 확실히 그 당황스러운 상황을 끝내는 방법이긴 했나 싶다-그 외계인이 갑자기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한 걸 보면 폭탄으로 인한 것인지 원래 그런 상태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상황의 것으로 볼 수 있다면-폭탄 공격에 대해 외계인이 영향받지 않거나 미리 알고 있어서 이미 처리되었거나 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쉽게 죽는다니. 이 역시 외계인 자체를 너무 인간의 시각에서만 그리고 있는 거 아닐까 하긴 소통이 가능해지는 과정 역시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그 과정을 보니 조선시대 중국에 간 사신들이 서로 말은 안통하는 대신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했다는 사실이 떠오르긴 했는데 그건 양쪽 다 한문을 익힌 계층이라 가능한 거였는데. 언어 자체를 가르쳐 가면서 하는 걸 보니 인간은 우주 어딘가에 떨어뜨려도 다 이기고 잘 살수 있을 거 같던걸. 인간이 아니라 루이스 개인의 성과라고 봐야하나
같이 외계인 조사하러 간 물리학자는 루이스에게 반한 채 루이스 케어하는 역할이나 하더니 역시나 외계인을 만난 것보다 루이스를 만난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는 작업멘트나 날리고 있다. 역시 과거였던, 아니 정확히는 미래인, 루이스를 떠나버리는 남편이 이 사람이었다 루이스의 끄집어 내어지는 기억에서 남편의 얼굴이 안나오고 있을 때부터 짐작이 가능하다 호크아이 배우 제레미 레너였는데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자기 가족들 다 가루되어버리는 과정이 떠올라서 배역이 잘 어울렸다 이 영화가 먼저였긴 하겠지만. 그리고 늘 뭔가 굉장히 사연이 있어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등장하는 포레스트 휘테커 여기선 어정쩡하게 좋은 사람인데 이 배우 볼때마다 별 역할이 아니어도 매력이 크다 크리미널 마인드 스핀오프였나 거기서도 인상깊었는데 영화 나올때마다 눈에 띄고 개성이 있다 역시 남녀를 떠나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깊은 눈빛은 배우에게 분명 도움되는 요소가 아닐까
앞날을 안다면 그 길을 가느냐의 문제가 내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안갈수가 있나? 인간 각자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게 자기에게 주어진 길이면 그걸 가야지 뭐 어쩐다는 건가 앞날을 바꾸려고 그걸 무시한다면 또 다른 앞날이 새롭게 보여질 것이다 그건 받아들이기 편한 일 뿐일까 이미 알고 있는 앞날은 피할 일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예지의 능력 같은 건 그냥 준다고 해도 두 번 생각해보면 그렇게 바랄 일이 아니다 그저 다음 주 로또번호 정도면 모를까
딸의 죽음을 보았다고 해서 딸의 탄생 자체를 없애버리면 그건 죽음의 경험을 안하는 만큼 괴로움과 슬픔을 없애는 일이 될까 그건 자기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다 짧아도 엄연히 존재한 딸의 인생을 없애는 게 어째서 자신의 선택 문제가 될까 물리학자는 죽을 걸 알면서 딸은 낳은 아내에게 화를 내며 그들을 떠나버리는데 정말 어이없는 머저리가 아닌가 싶었다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문제는 머저리에게 내가 앞일을 안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는 것이지 알아듣지 못할 사람에게 얘기할 필요가 있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심정으로 답답해서 떠들고 싶어도 다른데다 이야기하며 참아야 한다 그 정도가 루이스가 바꿀 수 있는 정도라고 본다 뭐 떠날 걸 알면서도 반복한다면 그건 루이스가 머저리랑 그만살고 싶었던 거라고 봐야지 이미 살아봤지만 다시 살게될 삶을 또 어떻게 살 것인지 마지막 루이스의 모습이 인상깊다 에이미 아담스는 원래도 연기를 잘했고 여기서도 내내 연기를 잘했지만 이 부분의 표정연기가 특히 좋았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며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을 통해서 그 사고까지 가능해진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어느 이론이나 그렇듯, 완벽하고 백퍼센트 다 들어맞는 건 없다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한 사례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존재 자체가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이론을 그렇게까지 믿지는 않는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는 말을 막연히 좋아해왔던 입장에서 그 말을 이 영화처럼 증명한 영화도 없지 싶다 지금까지는 지식의 정도를 얘기한 걸로 받아들였는데 인식과 사고 체계 자체를 말한 거라고도 볼 수 있겠구나 싶다
시제를 무시하고자 하는 시간과 우주의 영역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걸 통합할 수 있는 건 결국 언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언어의 목적은 소통과 화합이라고. 언어가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동조하지는 못하겠는 부분도 있다 이건 내가 언어와 관련한 철학적 영역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탓도 클 것이다
단순하기 때문에 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존재 그 자체라는 것으로만 결론내리는 편이다 그런면에서 인과론적인 삶이 아닌 목적론적인 삶은 솔직히 지금 내게 또다른 빠져나갈 구멍같으면서 단비같은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죄책감과 다가올 괴로움을 모두 떨쳐버려도 된다는 전환을 주었다 이 순간만이 아니라 잊지 않길 바라고 잊지 않으면서도 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