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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mp Jun 13. 2024

[영화] 3일의 휴가

김해숙 신민아

광고가 자꾸 눈에 걸렸다. 광고만 보고도 내용이 눈 앞에 펼쳐지는 수준이어서 그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설마 아니겠지 뭔가 다른게 있을 것이리라는 궁금증도. 

엄마와 딸. 심지어 둘 중 하나가 먼저 죽었고. 죽은 쪽이 살아있는 쪽을 찾아왔는데 살았을땐 서로 몰랐던 모습을 발견. 날도 더운데 뻔한 눈물샘을 한 번은 만나겠구나 싶었다. 

배경부터가 겨울의 매마른 시골인데 죽은 엄마가 휴가...를 받아서 딸을 보러 왔다. 사후세계 판타지까지 거드니 할 말 다 못하고 해어진 모녀 사이의 화해를 다루기엔 이건 뭐 클리쉐를 넘어 교과서쯤 되지 않을까. 그래도 배경에 힘입어서인지 담담하고 잔잔한 느낌이 나쁘지는 않지만 어설픈 고향의 맛, 엄마의 손맛, 음식힐링 이런 거까지 흔한 그림은 다 갖다 넣었다. 풀어내는 과정도 그럼 그렇지였다. 다만 딸과 직접 소통을 하면 다시 사후세계로 가서는 딸에 대한 기억을 다 잊는다는 설정을 넣었다. 기억이 곧 인연이라서 라는데 이게 얼핏 되게 마음 아픈 설정이 아닌가 싶지만 실제 인연법도 사후세계에 대해서도 아무런 고민이 없는 설정이 아닌가 싶다.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는 순간 육체로 살았던 인생은 잊는 맞지 않을까. 그런 것조차 안통할만큼 자식에 대한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고 싶었나. 아니 외국 대학 교수이던 딸이 엄마에 대한 기억과 죄책감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엄마가 살던 시골에서 백반집하며 미래도 없이 멍때리고 있는데 어느 엄마가 딸하고 소통을 마다하냐. 그 꼴을 또 굳이 휴가랍시고 내려와서 보고 앉아있는데. 

영혼이 되어서도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엄마의 활약 덕에 딸은 단순하게도 죄책감을 떨치고 자기 삶을 살러 떠난다. 엄마가 깔아놓은 꽃길을 대신 걷는다거나 딸이 흘릴 눈물마저 엄마가 흘렸다고 하는 그런 싶은 내용이면서도 눈물버튼이 되리라는 걸 노렸다고 본다. 결코 깊지 않은 눈물샘이긴 한데. 

엄마는 식모와 다를 없는 재혼을 해서 그 대가로 딸을 공부시키겠다고 정자기 딸은 보지도 못하고 외롭게 크게 하고 그게 오직 딸을 위해서 라고 하는데 진짜 가장 답답한 장면이었다. 그래놓고 커서 잘된 딸한테 이제서야 자꾸 나타나 못다한 친밀함을 채우려고 하는데 그게 될리가. 딸이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면 오히려 그건 걔가 이상한 아닐까. 그걸 엄마 마음을 모르는 거라고만 탓있나. 그럼 그렇게 자라왔던 딸의 마음은 어쩌라는 건지. 경제적 지원과 교육때문에 엄마가 희생한 거라고 그저 감사히 받아들여야 하나. 그래놓고 그리 일찍 세상을 떠나버려서 딸은 그걸 아파하고 그리워하고 그러느라 무려 우클라대학 교수가 김천에 내려와 엄마가 하던 백반집을 한다. 엄마가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그렇게 험한 인연으로 살아왔던 건데. 학교 이름으로 하는 민망한 농담같은 것이라든지 어느 하나 정해진 선을 벗어나지 않는 내용과 가이드나 엄마친구, 친구의 역할까지 너무 전형적이어서 키워준 외삼촌 부부가 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신선할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로 부모의 희생을 아름답고 숭고한 것으로 자꾸 포장하지 말아야 한다. 보기만 해도 부모되기 두려운 게 아닌가.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낮은 출산율에 말도 안되는 부모의 희생도 들어있지 않을까. 또한 현실은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부모들은 그만큼 자식들한테 받기를 원한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는 부모는 사실 미디어에서 자꾸 몰아가서 만들어내는 쪽에 가깝다고 본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한 인간의 일생에서 그저 한 부분이고 경험이면 안될까. 그렇게까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존재를 자신의 분신인 냥 아이만 낳으면 그저 아이의 엄마가 자신의 정체성인 채로 살아야 하는 걸까. 물론 요샌 안그런다고 많이들 표현하고 보여주기도 하지만 자식에 대한 엄마희생은 무슨 인간 본능의 도돌이표인 마냥 재생산을 멈추지 못한다. 왜 저 엄마는 딸 하나 가르쳐 보겠다고 그렇게까지 서로가 참고 버티는 인생을 살아야 했던건지. 딸은 또 중요한 때 내내 없던 엄마의 부재를 겪으며 컸기에 다 커서 다가온 엄마의 존재에 부담을 느꼈으면서 정작 엄마가 세상에 없다하니 지 인생마저 놓고 그리움으로 죄의식을 대신하면서 또 외로움을 느껴야 하는지. 정말 가장 힘들고 너무 버겁고 크게 자리하는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짓을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야만 했나. 아, 아니면 특별히 그렇게 끼어있는 불쌍한 세대에 대한 고칠과 헌사였나. 이 엄마는 자신이 어릴땐 공장에서 일하며 돈벌어 가족을 먹여살렸고 딸을 낳아서는 또 딸을 살리려고 저리 자신을 비우고 산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굴레 아래 이런 희생적인 삶믈 사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은 저 엄마 세대에 대한 안부를 계속 전하고 싶어서였을까. 모르겠다. 꽃노래도 한두번이지. 문제는 엄마의 희생도 자식의 죄책감도 그들의 인생을 너무 좀먹는다는 사실이다. 

영화나 미디어가 이제 엄마의 진심, 희생 같은 것 좀 그만 들먹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직도 그런 가스라이팅과 모성이라는 희생이 필요한가. 오히려 그걸 걷어내야 자식을 키우는게 부모의 희생이 아닌 그저 기쁨일 수 있고 부모가 되어도 자신의 이름으로 된 인생을 계속 살아나갈 수 있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 2023년에도 계속해서 너무 당당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며 자리하는 이런 영화들. 좀 더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러니한 건 오히려 요새 레거시 미디어에선 명절 특집 드라마로도 이런 내용을 양산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용이든 형식이든 캐릭터든 구태의연한 것에 대해 강박을 가진 것처럼 보여서 때론 그게 너무 심해 이질감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이걸보면 영화나 넷플릭스에서 어떤 부분들은 자신들만의 고집을 지켜낼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다고 여기는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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