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
<퍼펙트 데이즈>는 얼핏 소박한 삶을 예찬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박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소박한 집에서, 소박한 루틴을 반복하며 소박한 하루를 살아가며. 세상의 기준에서 홀로 행복을 누리는 삶. 그런 히라야마의 삶을 완벽한 날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소박하고 변함없는 루틴은 오히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위한 하나의 세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변화에 대해서 말한다. 그 변화의 속성에 대해 제대로 말하기 위해 실험에서 변인을 통제하듯 주인공과 그의 일상을 통제한 것 같다.
주인공은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의 일상은 규칙적이고,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변수는 끊임없이 들이닥치고, 그럴때마다 그는 난감해한다.
그런데 히라야마는 정말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일까? 변화를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가 느끼는 모든 기쁨과 환희는 변화로 말미암는다. 매번 변화하는 날씨에, 나무의 흔들림에, 순간순간의 아름다움을 그는 음미한다. 걸즈바에서 일하는 어린 여자에게 돌발적으로 볼뽀뽀를 받은 그의 표정은 분명 신이난 아이의 표정이었다. 조카의 난데없는 방문에도, 이름을 알수없는 누군가와의 틱택토 게임에도 그는 쉽게 행복했다. 열심히 거리를 두지만 막상 다가온 상호작용은 기쁘게 받아들인다.
변한다는 말로 이런 문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사랑이 변한다. 우정이 변한다. 초심이 변한다. 단골집이 변하고, 모교가 변하고, 고향이 변한다. 가족이 변한다. 규칙이 변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애석하다. 왜 꼭 변해야만 하는지. 지금 이순간과 같은 수는 없는건지.
그런데 이런 문장은 어떤가. 우울감이, 외로움이, 비참함이 변한다. (어? 벌써 희망이 샘솟는다) 봄이 여름으로 변한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된다. 악습과 폐단도, 고리타분한 의식도, 죄책감을 부여하는 세상의 인식과, 거친 누군가의 성품도 변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변화란 참 반갑고 좋은 것이기도 하다.
사실 변화가 좋든 싫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이 진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변화가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 태도만을 선택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쁨과 슬픔이, 괴로움과 행복이, 그 무수한 변화와 상호작용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인거늘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대반열반경(부처의 임종을 다룬 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