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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시 Jul 03. 2020

침묵하지 않는다

터키의 여성인권을 말하다

#1 에미네 불루트 살인사건



엄마 제발 죽지 마!

2019년 8월 18일 터키 크륵칼레 도심의 어느 한 식당에서 10살 딸을 둔 38세의 여성 에미네 불루트는 6년 전 이혼했던 전남편 페다이 바란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페다이 바란은 에미네 불루트의 딸이 지켜보는 앞에서 칼로 자신의 전처인 에미네를 살해했다. 에미네의 딸은 죽어가는 엄마를 붙잡고 오열했는데, 현장을 촬영한 비디오가 소셜미디어에 퍼지며 사건은 순식간에 터키 전역에 알려졌다.

Susamam - Şanışer

같은 해, 터키의 힙합 가수 중 하나인 샤느셰르(Şanışer)와 동료 가수들은 터키 사회 문제를 담아낸 노래를 대중에 공개했다. 정부와 터키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찬 이 노래는 공개와 동시에 큰 주목을 받았고 커다란 논란을 낳았다. 이 노래는 또한 에미네 불루트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터키의 여성 폭력 문제를 다루었다. '나는 침묵할 수 없다(Susamam)'라는 제목을 가진 이 노래는 샤느셰르를 포함한 18명의 가수가 참여해 만들어진 곡이며 자연, 동물권, 여성 폭행, 정의, 교통정체 등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담았다. 대략 15분에 이르는 긴 곡임에도 무려 800,000명이 뮤직비디오를 시청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결국 이 노래를 부른 18명의 가수들은 기소를 받게 되었다. 이 노래는 물론 풍자와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모든 내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노래는 재미로 듣기에는 매우 진지하고 어두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뮤직비디오 기준으로 7분 42초 경에 데니즈 테킨(Deniz Tekin)이라는 가수의 파트가 나온다. 기회가 되면 모든 가사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지만, 짧게 그녀의 가사만을 번역하였다. 모든 가사가 반어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Susamam에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했던 적은 없었지. 내 아이를 걱정해야 했던 적은 없었지. 강제로 결혼당한 적도 없었고 집에서 맞은 적도 없었지. 자기 집 자기 방에 강제로 감금된 적도 없었지. 세뇌당한 적 없었고 쫓겨난 적도 없었지. 당신들에게 혐오당하며 몸에 불이 붙어 생명을 잃은 적도 없었지. 나한테 형제 같은 건 없었지. 내 친오빠를 무서워한 적도 없었지. 학교에서 끌려나간 적도 없었지. 난 한 번도 죽임 당하지 않았어"


#2 여성 살인 통계와 잔혹성

여성 살인사건들(Kadın Cinayetleri)이라는 이름의 사이트는 터키에서 발생하는 여성 살인의 통계를 공개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2010년부터 지금까지 터키에서 무려 2016 명의 여성이 살해당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터키에서 발생하는 여성 살인사건들은 분명히 일정한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터키 사회가 가진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해당 사이트의 통계에 따른 26세부터 40세에 이르는 청년 세대가 가장 많이 살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Kadın Cinayetleri (https://kadincinayetleri.org/)
출처: Kadın Cinayetleri (https://kadincinayetleri.org/)

에미네 불루트 살인사건 이후로도 터키의 여성 살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터키의 여성 살인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2019년에만 474명이 살해당했다.

출처: Deutsche Welle Türkçe (DW.COM)

터키의 여성 살해는 굉장히 잔혹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185명이 총으로, 101명이 칼로, 29명이 목 졸려, 6명이 화학 물질로, 27명이 폭행으로, 마지막으로 6명이 불에 타 살해당했다. 이 통계가 시사하는 더 공포스러운 부분은 152명의 피해자는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았으며 134명은 남편, 25명은 헤어진 남자 친구, 51명은 관계중인 남자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3 나무스

사실 살인은 폭행의 궁극적인 형태이며 살인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여성 폭행사건이나 성희롱-성폭행은 터키 사회에 만연해 있다. 단순 폭행부터, 보복성 칼부림이나 염산테러 등 끔찍한 사건이 연일 터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마땅한 대책은 없는 상태이다. 가부장적 터키 사회에서 약자로 취급되는 터키 여성들은 외출조차 못하거나 남자 형제나 아버지와 함께 외출할 것을 강요받는 것이 일반적이며 시골에서는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채 집에서 자라는 경우도 허다하다. 히잡을 착용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신앙에 맡길 부분이지만, 이것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사랑과 질투를 핑계로 폭행과 희롱을 합리화하는 것도 흔한 일이다. 또한 터키어에는 여성 비하 표현으로 이루어진 욕설들이 가득하다. '창녀(orospu, kaşar)', '네 엄마를 강간하겠다(ananı sikerim)', '네 여동생을 강간하겠다(bacını sikerim)', '네 성기에 넣어버리겠다(amına koyayım)', '여자 성기(amcık)' 같은 욕설들이 그 예이다. 이러한 욕들은 굉장히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용자의 성별과 관계없이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출처: Habertürk

터키 사회에 만연한 여성 폭력의 이면에는 터키인의 다수가 믿는 이슬람에서 기인하는 '나무스(Namus)'가 자리하고 있다. 이슬람권 국가에서 한국어 '명예'에 해당하는 종교적인 개념이다. 흔히 '명예살인(Namus cinayeti)'으로 번역될 때 사용되는 이 명예가 바로 나무스이다. 나무스는 순결함, 명예 등과 직결되는 표현인데, 이를 더럽혔다고 판단된 대상에게 폭행을 자행하거나 대상을 살해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터키 사회는 이에 대해 상당한 집착을 보인다. 더 황당한 건 이들의 분노는 자기 친가족이어도 예외가 없다는 것이다. 2014년에는 휴가를 받은 터키 군인 쉴레이만 샤힌이 자기 여동생이 바람을 폈다고 판단하고 자기 친동생인 에다 샤힌과 그의 바람 상대를 총기로 저격하고 자백한 사건이 발생했다. 쉴레이만은 여동생의 결혼식을 이유로 휴가를 나온 상태였는데 기혼자인 그녀가 바람을 폈다고 결혼한 지 15일째 되는 날 그녀를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에다 샤힌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바람 상대였던 유수프는 병원에 이송됐지만 결국 생명을 잃었다. 그녀는 사건 당시 고작 18살에 불과했다.

출처: https://www.haberturk.com/gundem/haber/998996-uzman-cavus-dehset-sacti


#4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

터키 사회에서 여성은 분명한 약자이다. 이는 남성과 종교권력이 지배하는 특유의 사회구조에 기인한다. 수백수천 년을 이어온 이 사회구조는 쉽게 변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에게서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회에서 매장당할 두려움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어왔다.

사실 터키 정부는 여성 대상 폭행이 발생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여러 창구를 마련해 두었다. 지역마다 있는 사회복지센터나 여성연대센터에 신고할 수도 있고 183번에 전화를 걸 수도 있다. 병원을 통해 폭행 보고서를 받으면 경찰에 24시간 보호를 신청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들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책임은 여성들이 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가정과 일상생활이 붕괴할 것을 우려하며 폭행을 감내하고 견뎌낸다. 용기를 내어 이혼을 요구하거나 이별을 요구하면 그 보복으로 폭행과 살해 협박에 시달려야 한다. 터키 정부가 마련한 제도적 장치들은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아니다. 여성들이 사회의 주인이기보다는 남성 가장의 부속품에 가까운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오직 스스로를 사회와 가정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폭력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것을 정말 보호조치라고 볼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터키 사회가 달라져야 이러한 조치가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터인데, 현재까지는 여성 대상 범죄가 증가하고만 있는 추세이다.


#5 마치며

여성 대상 범죄는 세계 어디에서나 발생하고 있고 원인과 성격도 모두 다르다. 대부분은 남성의 우월지위에서 기인한다. 물론 남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격리시키는 것은 결코 해결방안이 아니고 역효과를 발생시킬 것이다. 한편 가장 두려운 것은 터키에서의 여성 살인사건들을 근거로 비이슬람권에서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증가하는 것이다. 원인을 이슬람이라고 진단하는 순간 이 문제는 좀처럼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터키인들 모두가 동의하는 방향에서 인식이 달라지고 제도적 보호장치가 이를 따라갈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터키인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우리 안에 생겨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의 원인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도 아픈 현실들이 있듯이 상대적으로 접근하되 터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현지인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아픔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종식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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