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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시 Jul 08. 2020

무너진 제국의 유산

성 소피아 대성당의 이야기

이스탄불에는 도시보다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한 오래된 건축물이 있다. 이스탄불의 랜드마크이면서도 오늘날 터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듯한 묘한 건물, 이 건축물은 그 이름도 유명한 성 소피아 대성당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의 옛 이름)의 주인이 바뀌고 제국이 무너지고 세워지고를 반복할 때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은 세 번째 중건된 교회로, 최초의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2세 통치기 360년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수차례 화재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겪은 뒤 3번째로 중건된 이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기에 서기 537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졌다. 당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이 교회가 완공되자 감탄하며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설했던 솔로몬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전해진다.

솔로몬이여, 짐이 그대를 이겼도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인류가 축적한 당시 기하학 지식을 총동원해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거대한 돔을 지붕에 씌워 만들어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세계 최고 규모의 대성당이었다. 이 교회는 유럽 세계를 통일한 로마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듯 제국의 심장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 성당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Ἁγία Σοφία라고 쓰이며 라틴어로는 Sancta Sophia라고 쓰였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룩한 지혜'라는 웅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 고전 그리스어로는 Hagia Sophia (하기아 소피아)라고 읽히지만 그리스어의 발음 구조 변화로 이 성당이 지어진 당대는 물론 현재도 성당의 이름은 '아야 소피아'라고 발음된다. 이 때문에 이 성당은 현재도 터키에서 Ayasofya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2019년 11월 13일, SONY ILCE-5000ƒ/2.2 1/160 50mm ISO1600

성당은 당시 제국의 전역에서 쓸어 모은 금은보화로 치장되었으며 비잔틴-그리스 모자이크 예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성당의 출구에는 위 사진처럼 휘황찬란한 그림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중앙에는 마리아의 품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우측에 도시 콘스탄티노플(당시 명칭: 노바 로마)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정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좌측에는 이 성당을 건축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정하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위치하고 있다. 사실 두 황제는 대제로 불리게 된 이유부터 다른 황제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를 제국에서 공인하여 제국 전역에서 수백 년간 자행된 기독교 박해를 금지해 대제로 불리게 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교회를 재건하고 기독 교회에 헌신하였다는 이유로 대제 칭호를 받게 되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정복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과 제국의 국고를 탕진하면서까지 이 교회를 복구하였다고 전해진다.

2017년 10월 20일, Apple iPhone 7ƒ/1.8 1/19 163.99mm ISO20

성당은 수차례 제국의 몰락과 부흥을 지나며 불에 타거나 무너지는 등 여러 수모를 겪었지만 굳건히 살아남았다. 제국을 침탈한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동로마 제국을 붕괴시키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성당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했을 때에도 이 교회는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엔리코 단돌로의 하수인들은 성당에 그의 시신을 안치시켰는데, 이 무덤은 아직까지도 교회에 남아있다.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 출처: https://hagiasophiaturkey.com/tomb-enrico-dandolo/

성당은 동로마 제국의 완전한 몰락과 함께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제국에는 ‘로마는 창건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 때 망할 것이다’라는 일종의 예언이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빈사상태의 제국을 구하기 위해 가톨릭 교황에게 구원을 청했지만 황제는 결국 전장에서 숨을 거두었고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왕조의 메흐메드 2세는 배를 끌고 산을 넘는 충격적인 전략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에 침투하고 우르반 대포로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을 부숴버리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점령했다. 이렇게 동로마 제국이 역사 속에서 퇴장하면서 성당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몰락에 동요하고 있었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튀르크족은 껍데기만 남은 채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던 로마 제국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그러나 메흐메드 2세는 매우 영리한 지도자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보호자를 자처하였고 이를 통해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과 새로운 관계를 쌓는 발판을 놓았다. 그는 스스로를 로마 황제(Kayser-i Rûm)라고 칭했으며 이후로도 오스만 왕조는 이슬람 왕조임에도 기독교 국가 왕가들과 혈연관계를 맺는 등 유럽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2018년 4월 1일, SONY ILCE-5000ƒ/5.6 1/80 16mm ISO2000

메흐메드 2세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을 금지하고 그들의 종교를 인정했다. 그 이후로 오스만 왕조는 대체로 기독교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었는데, 봉건 국가였던 오스만 왕조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명절과 문화를 유지하고 자신들의 법체계로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까지 허락하였다. 또한 그리스계 신민들은 엘리트 계급으로서 제국의 무대에 다시 진출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아나톨리아의 군벌 출신 귀족들을 억누르는 역할을 했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오스만 왕조의 황궁인 톱카프 궁전 바로 앞에 위치하여 황실의 모스크로 이용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성당은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이 성당은 본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지어졌으나 모스크는 메카를 향해야 하기 때문에 설교대가 메카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성당은 기형적인 이중적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성당을 장식했던 모자이크들은 10cm 정도 두께의 시멘트로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주교좌성당을 오스만 왕조에게 빼앗긴 그리스인들은 다른 성당을 이용하게 되었다.

2018년 4월 1일, SONY ILCE-5000ƒ/5.6 1/40 50mm ISO2000

오스만 왕조는 쉴레이만 대제 시기에 신성로마제국의 빈(현 오스트리아의 수도)을 포위하고 헝가리의 일부를 합병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초승달과 백합의 동맹이라 불리며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과학, 문학, 미술, 음악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신문물의 통로가 되었으며 유럽에 커피를 소개한 것도 오스만 제국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몰락은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른바 튤립 시대(Lâle devri)가 시작되는데, 유럽이 식민지 쟁탈전과 종교전쟁으로 혼란스러울 시대에 오스만 왕조는 여전히 봉건 구조를 유지하며 뒤쳐지고 있었다. 결국 오스만 왕조는 유럽의 병자라는 우스꽝스럽고 모욕적인 별명을 얻은 채로 몰락을 기다리게 되었다.

피에르빅토르 갈랑 작.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B2%A8_%EC%97%90%ED%8F%AC%ED%81%AC

유럽 최후의 봉건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의 위기는 사실상 유럽의 위기로 이어졌다.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였던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다는 건 곧 유럽의 현행 질서가 붕괴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고 불리는 유럽의 황금시대는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함께 무너지게 되었다. 유럽을 강타한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열강의 간섭 속에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해 나온 발칸 국가들 중 하나였던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하게 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영국 정부에 발주했던 함선이 제국에 인도되기도 전에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결정으로 영국 해군에 강탈당하자 안 그래도 국고가 거덜 난 오스만 조정은 분노했다. 이때 독일 제국이 오스만에게 군사 교관을 파견하고 함선도 기증하겠다는 제안을 해오자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에 가담해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독일은 이때 이후로 터키와 애증의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처칠의 오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전선을 시찰하는 무스타파 케말.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urkish_trenches_at_Gallipoli.jpg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을 공격하기 위해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르마라 해를 돌파해야 했는데, 이때 거점인 갈리폴리(현 차나칼레)를 공격하는 해군 역사상 최악의 오판을 저질렀다. 처칠은 갈리폴리 해전에서의 패배 때문에 훗날 총리가 될 때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영국과 동맹국 호주, 뉴질랜드군을 물리쳤다. 영국과 ANZAC군(호주-뉴질랜드 군) 수만명이 처칠의 오판으로 생명을 잃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게는 첫 원정이었는데 상당한 청년 인구를 전쟁으로 잃고 말았다. 이때 전장을 지도했던 젊은 장교 무스타파 케말은 세계대전에 참전한 오스만 제국의 오판을 비난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패전한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려던 영국, 프랑스, 그리스 군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성공적으로 축출하면서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을 건국했다. 이것이 그가 터키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Mustafa_Kemal_Atat%C3%BCrk

오늘날 그리스 영토이자 로마 제국 당시부터 제국 제2의 도시였던 테살로니키(터키식 지명 Selânik)에서 태어난 금발 벽안의 무스타파 케말은 서구 세계를 동경했으며, 전쟁을 통해 자기 고향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새로이 건국된 터키를 완전한 유럽 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 전후에도 대통령에 취임해 터키 정치를 지도하였다. 그의 재임기에 터키 정부는 원수인 그리스와 수교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당시 그리스의 수상이었던 베니젤로스는 아타튀르크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터키 정부는 당시 유럽 국가들의 요구를 수용해 성 소피아 대성당을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터키 국민의 반발을 감안하여 모스크도 성당도 아닌 박물관으로 개장하게 된 성 소피아 대성당은 그때부터 터키 정부의 관리를 받아 현대적인 수리를 받게 된다. 10cm 두께의 시멘트를 걷어내자 시대를 초월한 듯이 생생한 모자이크들이 드러났다. 시멘트 밑에서 산소에 노출되지 않았던 덕분에 훌륭하게 보존된 상태로 그림이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바닥에 깔려 있던 카펫을 들어내고 시청각 자료와 기념품 가게를 설치하는 등 박물관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성 소피아를 모스크에서 박물관으로 전환하는 행정명령과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의 서명. 출처: Habertürk

그렇게 민간에 개방된 성 소피아 대성당은 수십 년 동안 종교집회가 금지된 공간으로 유지되었다. 터키는 이후로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다문화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사이의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숱한 쿠데타와 경제위기를 겪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슬람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으로 출현해 경제위기를 해결하며 과반을 넘는 의석수를 기반으로 성장한 정의개발당(AKP)과 레젭 타입 에르도안은 터키의 정계를 장악하였다. 유럽 연합의 권고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공공장소에서의 히잡 착용을 허가하는 것을 시작으로 터키는 순식간에 이슬람화 되기 시작한다. 오후 10시 이후로 주류 판매를 금지하고, 공무원들의 히잡 착용을 허락하거나, 이슬람계 특수학교인 이맘 하팁 학교를 합법화하는 등 이슬람은 터키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부활하였다. 에르도안 정부에 이르러 그동안 억눌렸던 쿠르드족에 대한 차별이 완화되고 터키 동부지역 개발이 시작되자 쿠르드족도 현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에르도안 내각은 터키 정부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대한 우상화 정책을 폐지하고 민족주의적 요소를 배제하며 소수민족을 인정하고 중동 국가들과 연대하며 점점 유럽과 미국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터키가 미국을 도와 6.25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대가로 가입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날 정도로 터키는 반미-반유럽 정서로 들끓게 되었다. 정치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 흐름이 성 소피아 대성당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정도에 이르게 된 것이 문제였다.

출처: Euronews

에르도안 정부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정치적인 이슈로 부각해 터키 국민들의 표심을 종종 자극했다. 성당을 모스크로 환원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면서 국내 정치 지지율을 회복하는 용도로 쓰는 것이다. 미국과의 갈등에서부터 이어진 리라화 가치 폭락과 이로부터 촉발된 경제위기는 장기집권을 이어온 에르도안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터키 정부는 미국인 목사를 구속하거나 시리아 내전에서 실력행사를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 왔지만 미국은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고, 코로나 위기 속에 역성장을 이어가는 터키는 영국, 일본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하고도 환율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차기 대선을 준비해야 하는 에르도안은 승부수를 던졌는데, 그 화살은 하필이면 성 소피아 대성당을 향했다.

처음에는 성 소피아 성당에서 에르도안이 직접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읽는 수준의 작은 도발에 그쳤다. 그러나 이는 이웃국가인 그리스를 자극하는 선에 그쳤다.

터키 정부는 결국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전환하려는 결정을 내렸고 터키 법원이 이를 심사해 발표하기로 하였다. 만약 법원이 허가하면 성 소피아 성당은 거의 100년의 시간을 넘어 모스크로 환원되게 되는데, 일반적인 모스크처럼 바닥에 카펫을 깔게 될 것이고 유네스코는 성당의 문화유산 지위를 박탈할 수도 있다.

미국의 국무장관인 마이크 폼페이오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모스크로 환원하려는 에르도안 정부의 결정에 유감을 표하며 자제를 촉구했다.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도 터키 정부에 경고를 했다.

독일 외교부는 이 문제가 터키의 국내문제라고 일축하면서도 유네스코 유산으로 유지되는 것이 좋다는 견해를 밝혔다.

사실상 이 성당의 본 주인인(동로마 제국의 후신으로서) 그리스 정부도 박물관으로 유지해달라는 요청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까지 나서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터키 정부와 정교회는 일종의 신사협정 속에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정교회는 가톨릭과 달리 수평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각 국가의 교회가 독립적으로 활동하지만 관습적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정교회의 대외적 수장 역할을 하고 있다. 오스만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임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이 권한은 터키 정부로 이어졌는데, 지금도 터키 정부의 인가를 통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임명되기 때문에 정작 이스탄불의 총대주교는 아무런 발언권이 없다.

터키의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은 기본적으로는 박물관으로 유지되는 것을 바라지만 터키 정부가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상황에서 섣불리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표했다. 이슬람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에 반발했다가는 보수 유권자들의 표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야당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웠던 정당의 후신인데, 이슬람 이야기만 나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억누르던 이들이 이제는 이슬람을 두려워하며 떨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는 것이 애처롭기 그지없다.

2017년 1월 27일, Apple iPhone 7ƒ/1.8 1/523 3.99mm ISO20

터키는 헌법으로 보호되는 세속국가이다.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피땀으로 다시 세워낸 숭고한 민주공화국은 형태를 달리하며 위기를 지나왔고 지금에 이르렀다. 터키는 또한 우리나라의 최우선 우방국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주요 수출국이기도 하다. 터키는 오랜 시간 한국 교회의 선교 여행지로 사랑받았으며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신비롭고 성스러운 경험을 선사해준다. 찬란한 유산 위에 세워진 이 나라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교회가 모스크로 바뀐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10cm의 시멘트를 걷어낸 곳에 가려져 있던 예수님의 모자이크는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 우리에게 닿았다. 이 그림은 이 성당이 불타고 제국이 무너지고 주인이 바뀔 때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그림이 아닐 것이다. 성 소피아 성당은, 비록 지금은 낯선 땅에 있지만, 설사 무너지고 사라진다 하여도 우리의 기억 속에 존재할 것이다. 믿음과 믿음이 남긴 유산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황금빛 예수 그리스도는 묵묵하게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2020년 7월 8일,

윤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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