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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Sep 13. 2023

그럼에도 마음 둘 곳은 생긴다.

이런 비상식적인 처우에 나는 속 시원하게 때려치우고 나왔어야 할까? 그러기엔 아쉬운 쪽은 나였다. 경력을 이어 붙여 나가고 싶어 하는 쪽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그건 아마 회사도 알지 않았을까? 길게 쉰 경단녀를 뽑는 일이 종종 있는 일은 아니니, 본인들 입장에서는 어떤 인류애를 실현했다고 생각했을까? 


아무튼 나의 경단녀 졸업과 정규직 취업의 시작은 이렇게 거지 같았다. 사실 펼쳐놓고 보면 별 볼일 없을지도 모를 회사 생활에 이렇게 절절맬 필요가 없겠지만, 그때의 나에겐 새로운 이름표가 필요했다. 




건축 회사다 보니 남자 직원들이 우세한 편이었고 비록 여자 직원들도 10명 남짓 있기는 했지만, 기혼은 단 2명, 그리고 '엄마'는 내가 유일했고 최초였다. 즉, 회사는 지난 30여 년간을 그렇게 지나오면서도 '엄마' 직원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나는 팀장 같은 과장으로서의 아리송한 자리매김과 육아 휴직 내어줘 본 적 없는 회사에서 그들의 육아 감수성 수준을 잘 살피며 워킹맘으로서의 행동거지에 대한 포지셔닝을 잘해야 할 테다. 


사실 자기들 마음대로 야바위 하며 바꿔버린 직급 때문에 코칭이고 나발이고, 리더십이고 개뿔이고, 마음은 휘리릭 날아갔다. 그럼에도 '나 안 다녀!' 하기엔 내가 쫄 리니까 일단 여기서 업무력을 되찾으며 다음을 준비해 보기로 한다. 기약 없는 탈출구를 마음에 심어야 그나마 잘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기대했던 꽃길과 달리 시궁창이 돼버린 내 속도 모르고, 다들 새로 올 팀장에 대한 얘기로 이야기 꽃을 피운다. 10년 전쯤 이 회사에 다녔다가 재입사하는 사람이며, 해외 생활도 길었고, 국영기업에 버금가는 회사 대표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비서 경력도 있다고 하였다. 영어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성격도 좋고, 회사의 고인 물들과도 친분이 많은 사람이라, 어설프게나마 팀장 준비를 했던 나와는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팀장의 경력 사항을 들으니 내가 감히 비벼볼 엄두도 안 나고, 아무도 대결을 붙인 것도 아니지만 이미 KO 당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약 2주 후 마침내 새로운 팀장이 왔다. 


또각또각 4층 계단을 오르는 소리와 함께 길쭉하고 화려한 외모의 그녀가 걸어 올라온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사무실은 동문회를 방불케하는 반가움과 친근한 사이에서만 주고받는 장난 어린 말들이 오고 간다. 확실히 나의 첫 출근 날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다. 확연히 대조되는 분위기에, 어쩌면 나만 느끼고 있을지 모를 그 공기의 온도에 괜스레 다시 쪼그라든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가 된 기분이다. 면접 때의 화기애애는 잔향도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어쩌면 나, 경단녀 콤플렉스가 있는 걸까.


그럼에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다들 칭찬이 자자하셔서, 반가워요 팀장님!" 


기대한 건 사실이니까. 나이도 거의 비슷하다고 하는데, 업무력 차이가 너무 나면 어쩌지? 두려움 반, 어떤 사람과 같이 합을 맞추게 될까 하는 기대감 반. 그렇다, 결국 나의 콤플렉스에서 기반한 감정들이 뒤섞인 인사였다. 면접 제안 메일을 받고 솟구쳤던 자신감은 어디로 가고, 나는 잔뜩 움츠려져 있었다. 내가 계획했던 이미지 메이킹은 써볼 틈도 없이 어정쩡하게 자리를 찾아 앉고 막내에게 업무 설명을 듣는 나날을 보냈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전임자도 없었거니와, 본격적인 업무 분장 및 프로젝트 설명은 팀장이 오고 나서 진행한다고 하였기에)  시부랄! 나는 잔뜩 썽이 나있었다.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어긋나는 느낌이 드는 와중에 팀장마저 나와 결이 맞지 않아 평행선을 달릴 관계가 되면 어쩌나 싶었다. 그간의 회사 생활을 돌아보면 그래도 운이 좋게 마음이 맞는 한 명은 늘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존재만으로도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동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운을 너무 일찍이 다 써버린 탓에 그런 동료를 이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회사 사람들과 한바탕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팀장은 앞으로 업무 분장을 어떻게 할지 얘기를 나눠보자며, 회의실에 함께 모였고 나는 마음속 폭풍우를 잠재운 채 조용히 수첩을 펼쳤다. 


높은 콧대에 까칠할 것만 같았던 그녀는 초승달 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만나서 반갑다며, 본인도 팀장으로 복귀하게 돼서 긴장되지만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아까와는 사뭇 다른 웜톤의 진심을 머금은 듯 나긋하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잘 부탁한다는 뻔한 말을 덧붙이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울렁이며 다가왔다. 이내 영롱하게 빛나는 파츠 네일을 한 곧고 기다란 손가락을 춤추듯 아이패드를 꺼내어 반듯한 글씨로 프로젝트명을 적어 내려간다. 그 순간, 콤플렉스와 두려움과 긴장으로 움츠려 들었던 마음에 작은 빛이 새어들어왔다. 


그렇다. 예상 밖의 따스함에 동요되었지만 결국 그녀의 세련된 움직임에 나는 마지막 마음의 빗장을 풀어낼 수밖에 없었다.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손목에 시계가 딱! 차인 남자에 매료되는 이 만이 내 마음을 알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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