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이 아직 흩뿌려지기 직전의 어둠 속 고요함을 느끼고 있다. 창문 틈새로 밤새 내린 축축한 비 냄새와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거실 창문 앞에 놓아둔 여인초와 봉선화 잎은 새벽바람에 올라타 보일 듯 말 듯 흔들리고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어 본다. 하나, 둘, 셋 흐-읍. 하나, 둘, 셋 쉬-익. 하지만 들숨 날숨을 몇 번 하지 못하고선 이내 소파에 드러누워 동쪽 멀리에서 서서히 피어오르는 여명을 응시한다. 토요일이 주는 잔잔한 기대감 때문인지 읽어야 할 책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엉덩이만 괜스레 꿈틀거린다. 그러는 사이 푸른빛은 거둬지고, 구름 위로 해가 봉긋 솟아오른다. 햇빛이 내리쬐는 구석마다 그림자가 거둬진다. 어둠이 걷힌 길목을 보니 걷고 싶어졌다. 이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후드 집업만 챙겨서 나선다.
가을 아침 바람이 제법 차다. 겉옷을 더 여며도 피부에 내리 앉는 찬 공기에 솜털이 돋아난다. 평소 다니지 않던 길을 따라 요리조리 걸어가 본다. 이사 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곳 투성이다. 놀이터를 지나 관리 사무소를 등지고 오른쪽 길을 따라가 보니 텃밭이라고 쓰인 공간이 나온다. 아, 여기가 텃밭 신청을 받는다는 바로 거기였구나. 텃밭이 있을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았는데, 몸을 웅크리고 숨은 듯이 108동 앞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아직 텅 비어 있는 흙은 새로운 씨를 보듬길 기다리는 듯했다. 언젠가 제이와 함께 와서 씨를 뿌려보겠노라 작은 다짐을 하며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어떤 작물을 심는 게 좋을까. 매일 같이 오지는 못할 수 있으니까 키우기 쉬운 방울토마토 같은 거부터 시작해야 할까. 아직 텃밭에 머무는 생각을 풀어놓으며 걷다 보니 또다시 작은 놀이터가 나온다. 제이랑 전에 한번 와봤던 곳이다.
쓱 지나가려는데 놀이터 벤치에 뭔가 빵실하고 귀여운 실루엣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걸린다. 뭐지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갈회색 바탕에 연한 황톳빛이 브릿지처럼 섞인 고양이가 식빵처럼 앉아 나를 쳐다본다. 야-옹. 멀찍이 앉아서 신중히 눈 맞춤을 시도하려는데, 녀석이 포동한 몸을 쭉 늘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마치 기다렸다는 냥. 안녕? 야-옹. 만져도 돼? 야-옹.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나의 물음에 친절하게 대답해 준다. 그러자 녀석은 대뜸 엉덩이부터 들이밀며 또다시 야-옹. 저기.. 우리 초면인데요? 궁디 팡팡의 해달라는 속뜻도 모르고 나는 연신 머리며 등을 쓰다듬고, 그럼 녀석은 줄기차게 야-옹 거리며 엉덩이를 들이댄다. 여전히 엉덩이를 만지라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뚱한 곳만 쓰다듬는 나의 어리숙함이 답답했는데 아예 내 앞에 벌러덩 하고 눕는다. 으읏 심장이 치인다.
가방 속에 있는 츄르를 챙기지 못한 나의 준비성이 한탄스러운 순간이다. 발길을 뗄 수가 없다. 쪼그려 앉아 쓰다듬길 한참. 녀석도 갈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나 어쩌면 간택당한 걸까..? 집에 사람이 없으니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도 선뜻 결심을 세울 수 없었는데, 이렇게 강제 입양을 당한다면 그래 이건 어쩔 수 없지, 내 팔자소관인걸 체념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꿈꿨었다. 거리를 거닐다 우연히 만나는 고양이를 보면 내심 늘 그 순간을 기대해 왔다. 그래 바로 그날이 오늘이다. 그럼 뭐부터 준비해야 하지? 고양이를 키울 때 필요한 목록을 차근히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츄르부터 챙겨 와서 먹여야겠다 싶어 일어서는 순간, 야-옹(가냐?) 하더니 야-옹(잘 가)을 남기며 놀이터 안 쪽으로 유유자적 걸어간다. 어? 나를 따라와야지 왜 다른 데로 가는 거야 나 간택된 거 아니었어? 야옹아 어디가?
간다. 녀석에게 나는 그저 본인을 예뻐해 줄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나 보다. 나는 너에게 간택되길 바라고 있었는데 네 마음과 내 마음은 조금 다른 층에 놓여 있었구나. 아직은 내가 때가 아니었나 보다.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잊었던 산책을 시작한다. 두어 걸음 걷다가 뒤 돌아보기를 반복했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