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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 Oct 1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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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여름 어느 날

아빠는 지방에서 일하느라 늘 우리와 떨어져 지냈다.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집에 올라오곤 했는데, 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가 무얼 하든 언제나 맞다고, 잘했다고 예뻐해 주는 아빠가 매일 그리웠다. 딸 바보라는 별칭이 당시엔 없었지만 아빠는 딸이라면 끔뻑 죽는 사람이었고, 그런 아빠의 눈빛은 내겐 큰 기쁨이었다.  


아빠가 집에 오는 날은 평소보다도 눈이 더 일찍 떠지고, 아침부터 괜히 현관만 들락날락 대며 부산스럽게 굴곤 했다. 그날은 오랜만에 아빠가 오는 날이었고 원래 오기로 했던 날보다 한 주나 더 늦춰졌기 때문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한껏 기대에 차 있었다. 눈곱도 채 떼지 않은 채 일어나 엄마에게 물어본다.


“엄마, 아빠 왔어?”

“아빠 오려면 점심은 훨씬 지나야 할 거야.”  


점심이 훨씬 지난 시점이 언제인지 전혀 와닿지 않은 나로선 지금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저 실망만 쌓일 뿐이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골목만 연신 쳐다보는 일뿐이었기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몬드리안 무늬의 셔츠와 연두색 반바지를 차려입고 갈색 허리 벨트를 꼼꼼하게 채운 후, 현관 밖으로 나가본다. 새벽같이 대구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오전 중에 집에 도착할 리가 만무하겠지만 아빠가 보일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골목을 바라본다.


집 앞 놀이터에 아이들이 하나 둘 모이는 모습을 보며 나도 가서 잠깐 놀아볼까 싶지만, 이내 마음을 접는다. 흙먼지에 뒤덮여 꾀죄죄한 모습이 아닌 내가 생각하는 한 가장 예쁜 모습으로 아빠를 맞이하고 싶다.  


오후 2시쯤이 되어서야 골목 어귀에 보스턴백을 한 손에 쥐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낯익은 실루엣이 보인다. 아빠다! 있는 힘껏 발을 굴러 아빠에게 뛰어간다. 그런 나를 발견한 아빠는 가방을 옆에 내려 둔 채 날 향해 뛰어오며 나를 번쩍 들어 올린다. 유난스러운 부녀 상봉을 멀찍이 서 바라보는 엄마는 어서 집으로 들어오라며 채근한다.  


집으로 들어와서도 아빠를 만난 설렘과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아빠 얼굴에 뽀뽀를 잔뜩 퍼붓고서도 부족한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오느라 점심도 못 드셨을 아빠의 사정은 아랑곳 않고, 한껏 들뜬 마음에 빨간색 카세트 라디오를 켜고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어떤 음악이 흘러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엉덩이를 이리저리 씰룩거리며 춤을 췄고 오빠의 개다리 춤이 합류되고 아직 집에 들어와 앉아 보지도 못한 아빠가 트위스트를 추며 내 손을 맞잡아 주었다. 주방에서 아빠의 점심을 준비하려던 엄마까지 불러 모으며 좁은 단칸방에서의 춤판이 펼쳐진다.


핑크빗 잇몸이 훤히 보일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빠를 바라보고 있는 나, 그런 나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아빠, 더 빠르게 다리를 흔들며 개다리 춤을 추느라 여념이 없는 오빠. 흥겨운 음악 소리 사이로 “다들 여기 쳐다봐봐”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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