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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Jul 08. 2020

도전 냉장고 파먹기

 모처럼 된장찌개를 끓여보겠다고 결심을 했다. 요리 책에 나오는 대로 먼저 소고기를 다진마늘과 함께 볶아 마늘 향을 입히기로 했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냉동실에서 꺼낸 다진마늘을 볶는다. 치이익, 분명 소리는 좋은데 내가 기대하던 그윽한 마늘 향이 나지를 않는다.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분명 내가 예쁘게 큐브 모양으로 얼려둔 다진마늘이 맞는데…. 시간이 흐르고 온도가 충분히 올라갔는데도 형태가 풀어지지를 않는다. 다만 흐물흐물해질 뿐이었다. 내가 다진마늘이 분명하다고 믿었던 노란 빛을 띄는 작은 덩어리의 정체는 얼린 망고 조각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집 냉동실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결정적 순간이다. 나는 망고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너는 언제 냉동실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니?

들어가는 음식은 있어도 나오는 음식은 거의 없는, 마치 블랙홀 같은 나의 냉장고를 위한 심폐소생술이 필요했다. 원래 냉장고란 음식을 신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가 아니던가!


신선한 음식을 넣기 위해서는 나올 생각이 없는 터줏대감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단 다 버리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겠지만, 지구 저 편에서 식량 부족으로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선한 눈망울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 플랜B를 가동하는 수밖에. 일명 `냉파`, 냉장고 파먹기 돌입이다.


무려 국어사전에도 등재돼 있는 냉파란, `물가 상승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식비를 줄이기 위해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들을 활용해 음식을 해먹는 현상`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나의 냉파 목적이 식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식비도 줄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다.


냉파를 위해서는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우선 냉동실부터 열어보았다. 잠시 추억에 잠긴다. 아, 이 잡채는 엄마가 추석에 고이 담아줬더랬지. 우리 둘째 백일상에 올라왔던 백일떡이 차곡차곡 잘 쌓여 있구나. 음, 이 식빵은 남편이 퇴근길에 사왔었는데, 두 조각이 남았네. 그런데 언제였더라? 어라, 식빵이 아래 칸에도 있네. 응? 서랍 속에도 있네? 먹다 남은 식빵만 세 봉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감상에서 벗어난다.


약 2주일에 걸쳐 냉파를 진행하면서 나에게는 기대하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육아에 지쳐 종종 식사를 거르던 내가 삼시 세끼를 꼬박 챙기게 된 것이다. 냉장고를 얼른 비워야 제대로, 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오늘의 먹을거리`를 열심히 파헤쳤다.


집밥을 몹시 귀찮아하던 나는 생각보다 단순한 과정을 거쳐도 꽤나 맛있는 음식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억 속 잡채는 굴소스와 찬밥만 더하면 훌륭한 잡채 볶음밥이 된다. 엄마가 정성 가득 한솥 가득 끓여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아준 사골국은 냉동실 속 만두와 만나 만둣국으로 변신한다.


있는 재료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식재료만 구매해(많이 사면 냉장고가 다시 채워지니) 음식을 하다 보니 의외의 궁합(?)에 대해서도 공부하게 됐다. 매생이(도대체 왜 있었던 걸까)를 또 다른 냉장고 속 재료와 함께 요리해 처치하려고 고민하다 보니 돼지고기와 매우 합이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됐고, 집에 있는 돼지고기 다짐육으로 매생이국을 끓였다.

냉파는 꽤 알려진 용어이니 만큼, 냉파를 실천한 사람들 팁을 참고하기도 쉽다. 냉파 재료로 음식을 하는 `냉파 콘테스트`도 치러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온라인에 정보가 넘쳐나고, 처치하고 싶은 재료와 `냉파`라는 단어를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검색하기만 하면 된다. 냉장고에 쌓여 있는 백일떡은 이러한 집단지성을 십분 활용해 치즈 초밥을 만들어 뚝딱 해치웠다.


유대인들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1년에 한 번씩 부엌 속 식재료를 모두 비운다고 한다. 신선한 새 식재료를 채우기 위해서지만 이러한 전통(?) 덕분에 어차피 정해진 날 냉장고를 모두 비워야 하기 때문에 미리 쌓아두지 않는 습관을 덤으로 얻게 된다.


냉장고와의 사투를 끝내고 잠시 휴전에 들어간 나도 그들처럼 주기적으로 `식재료를 모두 비우는 날`을 정해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앗, 추석의 추억과 겨우 이별한 이때 어느덧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했다. 자식을 몹시 사랑하는, 손이 큰 우리 엄마가 두손 가득 안겨줄 설날 음식은 오래오래 추억하지 말아야지. 그게 먼저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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