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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Jul 19. 2021

내 공간을 버리니 내 공간이 생겼다

서재를 비우고 얻게 된 것들


 방 세 개인 신혼집을 얻으며 한 방은 침실, 한 방은 옷방, 그리고 남은 한 방은 서재로 용도를 정했다. 여타 비슷한 구조의 신혼집들처럼. 여기서 서재란 '책을 갖추어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이라는 사전적 의미 이상을 지닌 방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와인이나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기도 하는, 어찌보면 '어른 놀이방'인 셈이다.


그래서 널찍한 책장과 책상, 의자를 기본적으로 구비해 놓고, 편히 기댈 수 있는 빈백 소파도 들였다. 밤에 켜면 분위기 있는 무드등과 책상 스탠드, 기분 좋을 때 꺼내 마실 수 있도록 작은 와인냉장고도 이곳에 자리했다. 물론 이 와인냉장고에는 와인도 꽉꽉 채워넣었다.



하지만 꽤나 신경 써서 꾸며놓은 이 방엔 도무지 발길이 닿지 않았다. 책이 빽빽히 꽂혀 있는 책장을 두고 나는 늘 새 책을 찾았다. 스탠드까지 마련해 놓은 책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써야 할 때는 꼭 식탁에 앉았다. 빈백 소파는 거실 소파를 대신하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더더욱 이 공간을 찾는 일이 적었다. 와인냉장고에 있는 와인은 꺼낼 여유도 없었다.


크지도 않은 집인데 사용 빈도가 적다 보니 방에는 자연스레 잡동사니가 쌓였다. 책상 아래쪽은 안 쓰는 물건을 박스째로 모셔놨다. 보이지 않게 물건을 숨기기 딱 좋았다. 어느덧 책상 아래로 다리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책상에는 더더욱 앉을 이유가 없어졌다.


이렇다 보니 미니멀라이프에 도전하면서 가장 많은 물건을 떠나보낸 곳이 이 서재였다. 내 집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 마련한 곳인데, 창고로 활용되고 있는 게 허탈했다. 그래도 공간을 비워가며 다시 옛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다며 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쓰지 않는 물건을 비우다 보니 내 기준에서 빈백 소파도, 책상과 책상 의자도 빼야 할 처지가 됐다. 이 녀석들마저 떠나보내면 이 집에서 엄마가 아닌 나를 위한 공간은 정말 사라지는 건데라며 망설임이 시작됐다. 하지만 수차례 고민을 거듭해도 5년간 10번도 앉아보지 않은 책상은 비우는 게 답이었다.


결국 둘째가 태어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이 물건들을 비웠다. 방에는 서랍장과 곳곳이 텅텅 빈 책장만이 남았다. 그때 들어온 생각. 어라? 거실을 차지하고 있는 알록달록한 장난감들을 이 방에 넣어주면 어떨까? 거실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아이의 컬러풀한 주방놀이와 창가에 가득 쌓인 책, 블록놀이 장난감과 자질구레한 소품들을 서재로 옮겨주면 완전하진 않아도 아이에게 놀이방이 생기는 것일 텐데.


아기들을 재우고 늦은 밤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비워낸 공간에 물건을 가져다 놓기만 하면 되니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 책이 비워진 공간에 아이 책과 장난감을 넣어주고, 책상이 비워진 곳에는 주방놀이가 들어갔다. 장난감들이 잘 눈에 띄지 않아서 아이가 잘 갖고 놀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됐다.


하지만 일단 현란한 아이 물건을 방으로 옮기고 나니 한층 깔끔해진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와, 신혼집이 떠오른다고 하면 과장이지만(죄송합니다), 그래도 아이 물건이 눈에 띄지 않으니 진정으로 '육아퇴근'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를 재워두고 거실에서 남편과 함께 야식을 먹으며 TV를 볼 때마다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알록달록한 아기 소꿉놀이는 퇴근 후에도 여전히 쌓여 있는 일무더기 같은 느낌을 줬더랬다.


몇 년 전쯤 가구회사 이케아도 비슷한 콘셉트의 TV광고를 진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이들이 자기 전 신나게 놀아주며(라고 쓰고 '씨름하며'라고 읽는다) 난장판이 된 거실을 아이가 잠들고 난 후 부부가 순식간에 치우고 나서 분위기 있게 와인을 한잔 하는 내용이다. 이 광고는 수납장 겸 스툴을 소개하는 광고이긴 했지만 하여튼 아이 물건이 사라지면 이 공간은 오롯이 어른들 공간이 된다는 점은 같지 않은가.


장난감이 사라졌다고 울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나와 달리 다음날 아침 아기는 "와, 내 방이 생겼다. 여기는 내 주방이야!"라며 콩콩 뛰었다. 딸은 자기 주방으로 가서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 나에게 가져왔다.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며 나도 속으로 씩 웃었다. '나도 덕분에 내 공간이 생겼단다.' 그날 저녁 나와 남편이 맛있는 치킨과 함께 맥주를 마신 것은 안 비밀이다(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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