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비동염아 고맙다(?!)
얼마 전 지독한 감기에 걸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낫기는커녕 심해지기만 했다. 코가 단단히 막혀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감기 후유증으로 부비동염이 왔고 꽤나 증상이 심해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절망했다.
내 몸이 아파도 하루 종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고달픈 몸 상태가 쉽게 호전되지 않는다는 게 무척 괴로웠지만 이에 못지않게 애로 사항으로 다가온 점이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것, 즉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뛰어난 미식가는 아니지만 맛을 느끼지못하는 건 생각 이상으로 불편했다. 아이에게 줄 음식이 혹시 상하지는 않았는지, 맛이 이상해지지는 않았는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후각과 미각을 잃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시각뿐이었다. 유통기한이 하루라도 지난 음식은 먹을 수도, 먹일 수도 없었다. 나물을 비롯한 반찬은 일주일이 지나면 무조건 처분했다. 어쩔 수 없이 음식을 집 안에 오래 두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자연히 적게 사고 요리를 할 때도 그때그때 조금만 만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비자발적 미니멀라이프였다. 치료를 받은 지 한달이 다 되어서야 겨우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됐으니, 나름 훌륭하게 한 달간 음식 미니멀라이프 도전을 수행한 셈이다. 투병 중이었던 나에게 박수를!(짝짝!)
'먹을 수 있는 걸 왜 버려? 보기에 너무 멀쩡한데'라며 누군가는 혀를 쯧쯧 찰지도 모를 일이다. 멀쩡해보이는 음식을 버리는 게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다. 미니멀라이프 도전자인 나부터도 그렇게 생각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한 달을 반강제적으로 '적게 사고 적게 만들며' 살아보니 알겠다. 애초에 필요 이상으로 사고 지나치게 많이 만드는 게 낭비라는 걸 말이다.
언젠가 TV에서 경제적으로 상당히 풍족한 한 연예인이 남편과 집을 정리하다 갈등을 빚는 장면이 나왔다. 두 달 지난 라면을 버리려고 하자 '두 달쯤 지난 라면은 먹어도 상관없다. 이걸 먹으면 내가 죽느냐'고 화를 내면서 그 자리에서 라면을 뜯어 씹어먹었다.
이를 지켜보는 방송 패널들은 "과소비가 아니라 과절약이 문제"라며 한목소리를 냈다. 싸다고 대량 구매한 뒤 결국 다 먹지도 못하고 결국 음식물쓰레기를 만드는 건 절약이 아니라는 쓴소리도 TV를 통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썩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왜인지 머쓱해졌다. 후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을(?) 뿐, 미니멀라이프에 도전한다고 외쳤으면서도 번번이 세일의 유혹에 넘어가던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대량 구매한 뒤 결국에는 유통기한을 넘기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버리는 연습 버리는 힘'의 저자 노자와 야스에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찾아 버리라고 조언했다. 쇼핑과는 비교를 할 수 없는 개운함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한 행위는 아니었지만 한 달간 오래된 음식과 유통기한 지난 제품들을 처분한 덕에 비워진 냉장고를 보니 정말 개운해졌다.
책 '날마다 미니멀라이프'에서 소개하는 '비우기 기술' 중 첫째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꼽는 대표적인 쓰레기는 고장 난 가전제품, 낡아서 못 입는 옷들과 함께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었다.
굳이 책을 꺼내들며 근거를 찾아내지 않아도, TV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광경을 목격하지 않아도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나와 내 가족에게 좋은 음식은 그때 사서 신선한 재료로 만드는 음식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냉장고 비우기에도 도전하지 않았던가. 그 눈물겨운 도전기도 얼마 전 소개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도전하고, 반짝 성공하고는 금세 잊어버리고 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여하튼 다시 비자발적·반강제적이나마 또다시 냉장고를 비워냈다니 뿌듯한 것도 사실이다.
하, 만년 미니멀라이프 도전자에게도 봄은 오려나…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볕 들 날이 오겠지….나를 포함한 모든 미니멀라이프 도전자들이여, 힘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