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준비는 그야말로 '탕진잼(돈을 탕진하는 재미)'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만큼 많은 돈을 쓴 적이 있었던가. 한 주는 가구매장에 들러 수백만원어치 가구를 사고 그다음 주엔 '여백의 미'가 넘치는 텅 빈 신혼집에 거대하고 비싼 그 물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가구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가전매장에 또 물건을 '지르러'갔다. 사실 사는 데 다 필요한 물건이라고 확신하며 구입했던 물건이고 6년간 우리집을 변함없이 지켜준 친구들이기도 하다. 빈집이 내가 산 물건들로 하나하나 채워지는것을 보며 뿌듯해했던 예비신부가 바로 나였지…. 쇼핑 요정에게 날개가 달렸던 시절이었지….
회상은 그만.오랫만에 또다시 '탕진잼'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그것은 이사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쇼핑 요정이 아니라 미니멀리스트 도전자이기 때문에 사는 것만큼이나(!) 비울 것에 대해 고민해보기로 했다. 이전에도 이사 준비를 하며 그간 열심히 쟁여놓았던 소모품과 쓰지 않으며 쌓아놓은 물건을 줄여나가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이사 날이 다가올수록 한발 더 나가서 늘상 써왔고 항상 눈에 보이던, 나름대로 존재감 있던 물건들을 비워내보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드디어 이사 날, 가장 먼저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게 된 친구는 우리집 거실의 마스코트 역할을 하던 거실장이었다. 티비와 각종 인터넷 장비를 올려놓기도 하고 아기들 장난감을 넣기도 했던, 아직 걷지 못하는 아기의 훌륭한 걸음마 보조기였던 녀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 정감이 가던 가구도 아니었기에 비워보기로 했다. 사실은 이사하는 김에 새로 사고 싶었지만…. 일단 없이 살아보고 차차 구입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거실장 위에 올려져 있던 TV는 벽에 붙이고, 인터넷 공유기와 셋톱박스는 티비 뒤에 숨겼다. 아이들이 호시탐탐 노리던 전선이 시야에서 사라져 훨씬 안전해졌다. 손톱깎이, 각종장난감, 보증서 등 거실장 속 서랍에 있던 물건들은 각자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돌이켜보니 거실장에 있을 필요가 전혀 없었던 물건들이다.
거실장을 비우고 나니 가장 좋았던 점은 물론 거실이 상당히 넓어졌다는 것이다. 가로 2m, 세로 30㎝ 공간이 더 확보된다니. 굳이 비용을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버린 거실장 가격보다 공간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만족도 역시 그렇다. 거실장을 버린 것만으로 더 넓은 집에 사는 기분을 누릴 수 있었다!
이사로 포기했던 또 다른 물건들은 식기세척기와 오븐이다. 사실 이들은 애초에 빌트인 가전이기 때문에 이사를 하면서 새로 구입할지 말지 매우 고민했다. 식기세척기는 '식세기'라는 줄임말로 불리며 필수 혼수 가전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고, 오븐 역시 광파오븐이 일반화되면서 레인지 기능을 겸하며 주방 필수 가전으로 활약하고 있지 않은가. 내 주방에 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식기세척기를 들이며 포기해야 하는 주방 수납 공간이 아쉬워 일단은 구매하지 않고 지내보기로 했다. 광파오븐도 필요하면 구입하겠다고 생각하며 지름신을 억지로 잠재웠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지 세 달. 놀랍게도 이들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릇을 줄이고 나니 식기세척기를 사용할 만큼 그릇이 모이지 않을뿐더러 식기세척기의 세척 시간을 기다릴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식기세척기에서 그릇이 1시간 가까이 목욕을 하는 동안 대체할 다른 그릇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니 버틸 만했다. 간혹 집에 손님이 놀러왔을 때 그릇이 부족하면 일회용 그릇으로 대체하면 되기 때문에 그릇 양이 적어진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광파오븐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은 것은 내가 오븐을 자주 사용할 만큼 요리를 즐기지 않는 주부였기 때문이다. 6년간 내 곁을 떠나지 않던 오븐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내 자신을 깨닳았다. 웬만한 요리는 전자레인지로 데우는 정도로 해결할 수 있었고, 오븐의 역할은 에어프라이어와 미니오븐 격인 토스터기가 대체했다(그렇다. 나는 오븐은 없지만 미니오븐과 대용량 에어프라이어가 있는 '전직 쇼핑 요정'이다!).
가구는 아니지만 이사하면서 완전히 비운 물건 중 또 하나는 보디샴푸다. 피부가 건조한 편인 남편은 샤워하며 보디샴푸를 따로 쓰지 않는다. 첫째 아기는 아무리 순한 보디샴푸를 써도 피부가 건조해져 병원에서 보디샴푸를 사용하는 대신 보습이 되는 입욕제를 쓰라고 권했다. 보디샴푸를 샤워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가족 중 절반이 보디샴푸를 쓰지 않는 이 상황이 다소 생소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목욕할 때 보디샴푸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이사 전 소모품 소진 과정에서 똑 떨어진 보디샴푸를 다시 구입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다. 보디샴푸의 부재 역시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찝찝할 때는 세안비누로 거품을 내 샤워하면 된다. 아니, 왜 이걸 이 오랜 세월 동안 몰랐지?
물론 이 '없어도 되는 물건들'은 나만의 리스트일 수 있다. 남들에게도 '이 물건들은 절대 사지 마세요'라고 조언할 수 있을 만한 거창한 목록이 아니라는 소리다. 다만 이 과정을 겪어보며 내가 다른 이들에게 제안해볼 수 있는 것은 '물건의 부재를 버텨보기'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한번 지내보는 여유를 가지면 의외의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넉넉한 공간이 생기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