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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천 Aug 24. 2021

접시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청년—귀남이 형

*몇 해 전에 올렸다가 사정상 내렸던 글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생각나는 사연이라 약간 다듬어 다시 올려봅니다.*     


어릴 적 살던 동네는 야트막한 산들이 포근히 감싸고 있고 농촌 풍경과 정서가 많이 남아 있던 서울 근교의 작은 동네였다.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한 시절 산은 먹거리의 보고였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칡, 개암, 산딸기, 밤, 도토리 등 철 따라 먹을 것을 찾아 산에 올랐다. 아이들은 동네 형들을 따라다니며 먹을 수 있는 열매를 구분하는 법, 어떤 것은 먹을 수는 있지만 좀더 기다려야 하는지 등을 배웠다.      


아카시 꽃 향이 가득한 봄이 되면 아이들은 바구니를 들고 뒷산에 올라 아카시 꽃을 가득 담아 왔고, 그런 날 저녁에는 집집마다 화전 내음이 가득했다. 마당의 평상에 앉아 달콤한 아카시 화전을 먹고 있노라면 봄날 저녁이 부드럽게 저물어갔다.   

  

겨울이면 산등성이에 올라 연을 날리는 것이 아이들의 큰 즐거움이었다. 동네 형들은 사금파리 가루를 풀에 개어 연실에 먹이고 거기에 방패연이나 가오리 연을 달아 상대편의 연실을 끊는 연싸움을 했다. 아직 그런 연을 만드는 법도, 연싸움 요령도 배우지 못한 꼬마들은 그 광경을 감탄하며 지켜보며 부러워했다. 우리는 언제 저런 연싸움을 할 수 있을까.     


내 연은 아버지가 만들어주셨다. 균형 잡기가 방패연보다 쉬운 가오리연이었다. 하지만 연싸움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한두 해 지나자 나는 연을 직접 만들어보려는 마음을 먹었다.      


쉽지 않았다. 물론 대강의 순서는 알고 있었다. 우선 헌 비닐우산을 구해서 비닐을 벗기고 대나무 살을 발라낸다. 그 살을 연의 크기에 맞게 자르고 적당한 두께가 될 때까지 칼로 다듬는다. 그리고 나서 연의 모양에 따라 적절한 각도로 휘게 한 뒤 연 모양의 종이에 고정시킨다. 바로 이 대목이 가장 어려운 관문이었다. 연의 균형이 잘 잡히면서 바람을 잘 받는 정확한 각도를 찾는 일과 그 각도로 살을 고정시키는 작업은 다년간의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일단 살을 고정시킨 풀이 마르면 수정이 불가능하니 그냥 날려야 했는데, 내가 만든 연은 대개 하늘 높이 솟지 못하고 뱅글뱅글 돌다가 떨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어쩌다가 제대로 만들어도 일 년간 보관하기도 마땅치 않고, 설사 보관했다 하더라도 망가져있기 일쑤여서, 나는 겨울마다 연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연만들기 실력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내게도 형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아마 그때 처음 진지하게 했던 듯하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내게 멋진 연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생겼다. 당시 동네 한 귀퉁이의 초가집에는 귀남이 형과 홀어머니가 살았다. 내가 기억하는 시점에 귀남이 형은 이미 청년이었는데 그는 소아마비로 한 다리가 오그라들어서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녔고, 그의 어머니는 집에서 떡을 만들어 광주리에 이고 팔러 다녔다. 그 집은 동네에서 제법 사는 부잣집 한 모퉁이에 붙어 있었는데, 듣기로는 부잣집 주인이 먼 친척이어서 거기에 살게 해주었다고 했다.     


귀남이 형이 학교는 어디까지 다녔는지 모르지만 직업은 당연히 없었는데 대신 손재주가 뛰어났다. 나무를 깎아 인형도 만들고 고장 난 라디오를 고치기도 했다. 그 집에 가면 그는 어둑어둑한 방 한 귀퉁이에서 백열등 하나 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 꿈지럭꿈지럭 매만지고 있었다.     


공작 숙제 중 어려운 것이 있으면 그에게 가져가 도와달라고 했는데 그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나는 대신 삶은 고구마, 밤, 옥수수 등을 갖다 주기도 하고, 어쩌다가 손님이 가져온 과자가 있으면 그걸 주기도 했다. 어느 해인가 나는 그에게 연을 만들어달라고 졸랐고 그는 별 말없이 만들어주었다. 그 후 몇 년간 내 연을 만드는 일은 그의 몫이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나를 위해 방패연과 얼레를 만드는 데는 며칠이 걸렸는데, 그 동안 나는 그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그가 연을 만들고 나무를 칼로 깎아 얼레를 만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저녁시간이 되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아주머니로부터 팔다 남은 떡을 얻어 먹기도 했다. 순박한 모자였다.     


그가 만들어 준 연과 얼레를 받아들고 뒷산에 올라가 날렸을 때, 내가 만든 연과는 비교할 수 없이 멋지게 하늘 높이 솟는 연을 보며 나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고 어깨가 으쓱했다.     


그러다가 몇 년 후 우리 집이 조금 떨어진 동네로 이사한 뒤 귀남이 형을 만나는 일은 점점 드물어졌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어릴 때 알던 형과 누나들은 어른이 되었다. 내가 살던 동네에 신작로가 뚫리고 큰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더니 길가의 논에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산으로 밤을 따러 다니거나 겨울에 썰매를 타거나 연을 날리는 아이들도 사라졌고 내가 귀남이 형을 찾을 일도 없어졌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도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다른 질병이 있었으니, 간질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뇌전증이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발작이 시작되면 눈이 뒤집힌 채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켰다. 그 광경을 언제 처음 보았는지는 잊었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매우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의 병을 알고 있던 동네 형과 누나들은 잠자코 지켜보면서 그가 다치지 않도록 돌멩이 등을 치워주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청년은 잠에서 깬 듯이 정신을 차렸고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 그런 광경을 몇 번 목격한 뒤 나도 큰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발작이 끝내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가 딱하게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우선 그의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 이유가 참 안타까웠다. 팔고 남은 떡이 아까워서 저녁 대신 먹다가 목이 메어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괜찮았겠지만 노인이 되어 삼키는 힘이 약해져서 일어난 일이다. 남편도 없이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평생 떡장사를 하며 살다가 그 떡에 목이 메어 세상을 떠나다니. . . 그 아들은 하필이면 그 때 집에 없었다고 한다. 내게 떡을 주며 빙그레 웃던 그분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 기구한 인생이다 싶어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다가 얼마 후 이번에는 귀남이 형이 세상을 떠났는 말을 들었는데, 그 사연 또한 먹먹한 것이었다.     


아주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작은 셋방에 혼자 살던 그는 약간의 장애인 수당도 받고 손재주를 이용해 때때로 과외의 수입도 올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혼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는데, 그를 딱하게 여긴 이웃 사람이 여자를 소개시켜주어 어찌어찌 결혼을 하게 됐다. 

     

장가가는 날이 정해지자 그는 좋아서 며칠간 잠을 거의 못 잤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가 아마 서른 중반은 넘었을 것이다.     


장가가기 전 날 밤 그는 마당에서 몸을 씻기로 했다. 그가 살던 집은 마당을 중심으로 사각형으로 지어진 건물에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낡은 다가구 주택이었다. 목욕시설은 물론 없었다. 목욕탕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가더라도 그가 혼자 씻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 이웃들이 잠든 한 밤중에 마당에서 큰 통에 물을 받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을 씻는데 그 때 사달이 났다. 씻는 동안 발작이 시작된 것이다. 발작이 진행되는 동안 환자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발작이 시작되자 철퍼덕 철퍼덕 물소리가 요란했지만 살려달라는 말은 당연히 할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깊이 잠든 사람은 물소리를 듣지 못했고 잠들지 않은 사람은 일부러 못 들은 척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속으로 웃었는지도 모른다. 장가가는 게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열심히 씻을까 하고. . .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물소리는 잠잠해졌다. 그리고 무릎 깊이도 되지 않는 통에서 나오지 못하고 그는 세상을 떠났다.     

 

장애인에게 목욕을 시켜주는 복지 서비스가 제공되는 요즘 살았더라면 그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아이도 한둘 낳아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기구한 삶을 살면서도 강퍅하지 않았고 이웃에게 베풀며 살던 모자가 그렇게 어처구니없게 세상을 떠난 사연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다. 


이제는 목이 메는 일도 없고 발작도 없는 곳에서 아이들을 위해 연을 만들고 있는 귀남이 형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 어느 연보다 더 멋진 방패연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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