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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한우 Sep 25. 2022

2000미터를 넘는 산은 난생처음

[도쿄등산 1편] 도치기현 栃木県 시라네산 白根山 2587미터 

등산을 시작하게 됐다. 


제법 선언 같은 문장을 적고 나니,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대고 높은 곳을 올라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라고 등산에 빠져있는 친구들을 보고 고생을 사서 하는 취미는 관심 없다고 떠벌였던 게 생각이 나서 머쓱하기만 한데 지난 초여름에 다녀왔던 도쿄 근교의 다카오산高尾山의 여운이 이상하게 계속 몸에 남아 있는 걸 느끼고 나서 "어? 산이 좀 나한테 맞는가?"라는 얼토당토 한 생각에 그럼 낮은 산이라도 좀 다녀봐야지 하고 마침 한국출장 들어왔을 때 조깅화에 크로스백을 매고 마실 나가는 기분으로 "도봉산이라도" 다녀와야지 하고 훌쩍 나갔다가 그 "이라도"에 호되게 혼이 나고 온갖 고생을 하고 겨우 내려왔던 경험을 했더랬다. 사실 최단코스로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면 그 정도는 아니었을 터인데, 중간 갈림길에 일흔을 훌쩍 넘으신 노장 여성 등반가의 꾐에 빠진 게 고생의 시작점이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언제 다시 또 여길 오겠어. 곧바로 내려가지 말고 저쪽 능선을 좀 따라가면서 다른 산들도 구경하고 천천히 내려가. 물이 좀 모자란 거 같으니 내가 나눠줄게. 일흔을 넘긴 나도 그 길을 통해서 왔는데 젊은이가 그거 못 가겠어?" 


맞다. 난 젊. 은. 이. 다. (으쓱)


크로스백 조깅화 젊은이는 꽤 용감했다. 능선을 따라간다는 등산로로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15분 정도 아무도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덜컥 무서웠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조난인가? 그러자 저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너무 반가웠다. 인사라도 하려고 반가운 얼굴을 할 무렵 그 반가운 인기척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등산로 맞아요? 저 조난당한 줄 알았어요 ㅜㅜ" 


이럴 때일수록 있는 척을 해야 한다 라는건 눈칫밥 먹고 외국에서 장사치를 시작했을 때부터의 습관이었다. 


"아... 괜찮습니다. 여기서 이 길로 가시면 곧 정상이 나와요. ㅎㅎㅎ 힘내십쇼"  


해맑게 웃는 건 딱 요기까지였다. 저 모자도 내려오다가 넘어지면서 어딘가에다 잃어 벼렸다.

사람이 올라왔으니 등산로는 맞구나 싶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조난은 안 당하겠다. 열심히 내려갔다. 올라간 시간의 두배 정도 걸렸다는 생각이 들 무렵 표지판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안녕히 가세요. 북한산 국립공원 관리공단" 

후아..... 드디어 내려왔다. 만세!!!!!!


내려와서 보니 12킬로 정도를 걸었다고 핸드폰에 표시가 되어있었다. 등린이한테는 일종의 공포체험이 되었지만 그다음 날이 되자 신기하게도 또 산에 올라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무서웠다. 혹시 내가 자신을 괴롭히면서 쾌감을 얻는 그런 종류의 인간인 건가? 









그런 좋은? 추억을 가지고 일본에 돌아왔다. 그래서, 이 참에 등산을 좀 해보자 하고 일본에 돌아와서 산을 좀 뒤졌다. 세상에 일본에 이렇게 좋은 산이 많은지를 그때서야 알아버렸다. 2700미터가 넘는 산이 무려 90개에 달한다는 사실과 3000미터를 넘는 산도 21개가 있다는 내용을 알고 나서 산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등산이 취미인 사람에게는 천혜의 자연이 일본에 있는 거구나. 


그때부터 조금씩 올라가 볼 만한 산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산이 870미터급의 쯔구바산筑波山이었다. 높이가 만만해 보여서 이 정도야 그닥 어렵지는 않겠네라고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길을 나섰는데 이게 또 큰 오산이었다. 쯔구바산 얘기는 별도 [도쿄등산]의 한 꼭지로 적어보려고 한다. 


쯔구바산을 어렵게 돌파하고 나서, 그다음에 눈에 띈 것이 시라네산白根山이었다. 도쿄 인근에서는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베이스가 화산火山이고 휴화산이라 언제든지 터질지도 모른다는 (묘한 모험심이 들게 하는) 산이라는 설명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래, 이거야. 내가 도봉산도 맨손으로 올라갔다 왔는데" 

(도봉산 개고생 이후, 고난의 기준이 도봉산이 되었다)


높이를 살펴보니 2587미터. 아아...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2000미터 이상의 땅이구나. 너무너무 궁금하다. 생각해보니 나를 산으로 이끄는 게 이 호기심이라는 녀석인 거 같다. 맨몸으로 올라가기는 기온차도 있고 높이도 있고 해서 준비(심지어 고산병 걸리니 산소캔도 들고 가야 하는 거 아냐?라는 어이없는 ㅎㅎ)를 차곡차곡했다. 배낭과 스틱도 장만하고, 정상에서 물이라도 끓여보려고 버너와 코펠도 구입했다. 지난번 쯔구바산때 아침까지 비가 왔었던 젖은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열 번은 더 미끄러지면서 싸구려 등산화 탓만 했던 기억에 주말에 화창한 날만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몽땅 반짝반짝 새 거인 장비들을 둘러매고 시라네산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나보다 더 등산 초보인 두사람(회사직원들)의 동행이 있었다. 


사실 먼저 고백을 좀 하면, 시라네산은 겨울철에는 기슭부터 스키장인 구간이 있어서 2000미터까지 로프웨이를 타고 편하게 올라갈 수 있게 되어있다. 그래서 일본 산행의 난이도의 최상급을 5레벨이라고 한다면 2레벨 정도의 초보자용 산이기도 하다. 로프웨이를 타고 올라가니 산 정상이 한눈에 보이면서 경치 좋은 카페가 있는 잘 가꿔진 정원이 있었다.   


로프웨이를 타고 올라가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2000미터 지점에서 시라네산 정상이 보인다 
로프웨이 정상에 있는 카페와 정원 


2000미터 로프웨이 정상에 있는 이 자연환경만으로도 (가장 힘든 산이 도봉산이라는) 등린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처음 사용해보는 배낭끈도 조이고, 스틱도 펼쳐서 바닥에 한번 찍었다. 출발!! 


등산로 입구에는 신사가 있음을 보여주는 토리이鳥居 가 있다. 


처음에는 제법 울창한 숲(그렇지 여긴 2000미터에서 시작이지)들과 자그만한 웅덩이들 그리고 자연과 잘 어우러진 평탄한 등산로가 이어졌다. 등산이라기보다는 가벼운 트래킹 같은 코스가 계속되다가 20분 정도 기분 좋게 걷는 시점부터 경사가 시작이 됐다. 


 

길게 자란 나무뿌리들이 좋은 자연 등산로를 만들어주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경사가 조금 더 가팔라지면서 나무의 키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해발고도 덕분에 지상보다 훨씬 낮은 기온이긴 했지만 경사를 오르는 몸뚱아리에서 나오는 열에 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에서 낮아지는 나무들 덕분에 그늘이 없어지면서 얼굴이 햇볕에 노출되어 선글라스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무들에 가려져 있던 산밑 경치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면서 구름을 발아래 두는 장관이 조금씩 펼쳐지고 있었다. 


나무들 키가 부짝 작아졌다.
2300미터 지점의 조그마한 휴식처. 벌써 발아래 구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500미터 근방은 이른바 수목한계선(나무가 자라는 한계선)이라고 한다. 일본어로는 산림한계山林限界라고 하는데 난생처음 경험해보는 나지막한 나무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가장 더운 날의 온도가 10도 이하일 경우에 이끼류를 제외하고는 식물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경계선이라고 했다. 이제 조금만 가면 그 수목한계선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벌써 다리가 퍽퍽했지만 조금 더 힘을 냈다. 궁금한 건 못 참으니까 ㅎㅎㅎㅎ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넘고 나니 믿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졌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황량하지만 너무 멋진, 정상을 향해서 길게 늘어선 등산객의 모습들이 이제 곧 이 산행의 결과물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반가움과 함께 경이롭게 다가왔다. 일단 조금 쉬어가기로 하고, 경치가 제일 좋은 곳에서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뒤에 오던 산악가이드(인듯한) 한분이 거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혼찌검을 내셨다. 고산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로프가 쳐져있는 걸 모르고 들어가서 기념사진을 찍는 바람에 꼼짝없는 어글리 코리안이 돼버리는 ㅠㅠ 거듭 사과를 드리긴 했지만 시라네산에게 미안했던 순간이었다. 대한민국에게도 미안 ㅜㅜ 


바로 이 자리에서 혼찌검이 났다 ㅜㅜ 뒤쪽에 보이는 곳이 시라네산 정상


자 한숨 돌렸으니, 이제 정상공격 ㅎㅎㅎㅎ  

정상은 급경사의 자갈길과 바위길을 순례자들처럼 줄을 서서 올라가야 하는 꽤 힘든 루트였다. 7만원짜리 등산화나 30만원짜리 등산화나 똑같이 주룩주룩 미끄러지는 생각보다 꽤 고된 길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정상이 눈에 보인다 라는 건 사람을 계속 걸을 수 있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는 걸 알았다. 역시 시각이라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거구나. 정산 팻말처럼 보이는 나무 말뚝을 향해 계속 걸었다.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암장이지만 더 힘을 냈다. 왼쪽 로프가 들어가지 마세요 로프다. ㅎㅎㅎ


정상 팻말인 줄 알았더니 정상으로 가는 안내목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다리에 힘이 주욱 풀렸지만 정상 부근의 화구火口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모습들이 눈에 들어와서 피곤함을 잊을 수 있었다. 널따란 화구 주변에서 정상을 밟고 돌아와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간단하게 취사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무 한그루 없이 낮은 이끼나 풀들만 있는 황량한 모습이었지만 바위와 구름과 하늘이 만들어내는 배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래서 산들을 오르는구나. 


정상 바로밑에서 하늘과 바위를 배경으로 한컷. 오른쪽 사진은 칼데라호수인 고시키누마五色沼.색깔이 너무 예뻐서 돌아가는 길에 꼭 들려야겠다고 맘먹었는데 거리가 꽤 있어서 포기했었다.
화구 주위에 휴식하는 사람들

마지막 암장들을 넘어서 정상을 향했다. 일본에서는 다카오산,쯔구바산에 이어서 세 번째 산 정상이었다. 2500미터급의 산은 처음엔 겁이 났었지만 그래도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한 산행길이었고, 이게 뭐라고 숫자가 주는 달성 감이 제법 컸다. 도쿄등산 코너가 앞으로 어떤 산들을 글로 옮기게 될지 모르겠지만 시라네산 정상은 그 어떤 산보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시하네산 정상 2578미터 

정상 부근에 가면 꼭 물을 끓여서 음식을 먹어보겠노라고 버너와 코펠을 샀기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불을 피웠다. 처음이라 요리를 해 먹는 수준은 아니어서 겨우 사발면에 몇 가지 토핑을 넣고, 시원하게 보관된 사과를 깨물고 따뜻한 믹스커피(뭐니 뭐니 해도 한국사람은 ㅎㅎㅎ)를 마시면서 정말 오기 잘했다고 같이 간 일행들과 함께 껄껄 웃었다. 저엉말 좋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캬.... 믹스커피 ㅎㅎㅎㅎㅎ


버너와 코펠은 SOTO라는 일본 브랜드 제품인데, 가격도 리즈너블 하고 성능도 훌륭해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솔로 캠프나 등산에 딱 좋은 크기와 무게감이었다. 하나씩 사모으고 있는 이른바 "장비"들은 언제 도쿄등산코너에서 리뷰를 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 선입견 없는 등린이의 리뷰가 이외로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은지도 모르겠다 ^^  30분 정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고시키누마_五色沼 라는 비췻빛의 연못을 꼭 가보고 싶었는데, 초행길이라 로프웨이의 막차시간에 혹시 못 맞출 수 있을 듯해서 서둘러서 왔던 길로 그대로 하산을 했다. 몇 번의 산행에서 느끼는 거지만 쉬울 것 같이만 보이는 하산길에 항상 미끄러지거나 위험한 경우를 당하는 때가 많아서 조심조심 내려왔다. 수림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자갈길이어서 오히려 살짝 미끄러져 내려오는 방법으로 걸었더니 조금은 수월했다. 요령이 조금씩 생기는 듯하다. 


 

하산길은 늘 조심스럽다.


무사히 하산해서 로프웨이 정상 역 주변에 카페에 들렀다. 땀 흘리고 마시는 시원한 아이스커피가 정말 별미였다. 하긴 이 정도 경치에서 뭔들 맛이 없겠느냐만 ㅎㅎㅎㅎ 로프웨이의 밑쪽은 스키장 슬로프여서 여름에는 아주 좋은 잔디밭이 되어 있었다. 오토캠핑장으로 활용되고 있어서, 내년 봄쯤에 다시 한번 와서 캠핑과 등산을 같이해도 너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세 번째 산행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왼쪽) 일요일 오후라 꽉 찼던 텐트가 하나만 남았다. (오른쪽) 로프웨이 정상카페에서 마시는 아이스커피 ^^


일본은 온통 화산과 온천지대여서 산행을 마치고 몸을 담그는 성분 좋은 온천이 곳곳에 있다. 어김없이 시라네산 기슭에도 좋은 유황 온천지대가 있었다. 그중에서 한 군데를 골라 들어갔다. 녋다란 로텐부로_노천온천_露天風呂에 몸을 담갔다. 온천물이 온몸의 피로를 다 가져가는 듯했다. 온천 후에는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된장소스 돈까츠를 먹었다. 같이 갔던 멤버에게 오늘 산행에서 제일 좋았던 게 뭐냐고 했더니 모든 좋은 것이 다 연결되어 마지막 결과로 남은 지금 먹는 맛있는 돈까츠가 제일 좋다는 나이답지 않은 명언을 남겼다. 이 친구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지. 


오는 길에 들렸던 온천 야쿠시노유_薬師の湯
자연에 어우러져있는 노천온천 

난생처음 2000미터를 넘는 산을 다녀왔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출발했던 길이었으나 생각보다 수월한 등산길이 그다음 산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었다. 얼마나 자주 산행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일기예보를 살피는 일은 계속될 듯하다. 도쿄 주위에 7군데 정도의 코스를 정했다. 내년 봄까지 하나씩 다녀와서 [도쿄등산]을 코너명으로 간단한 글을 남겨보려고 한다. 도쿄의 등린이의 고생담에 관심 있으신 분은 주목해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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