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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Nov 24. 2020

Lewina's 책일기, 책읽기

김종관 <당신에게 일시정지를 권유합니다>

죽음의 안내자가 권유하는 일시정지의 기록.

내 아빠가 폐에 생긴 희귀병으로 인해 모 대학병원 호흡기내과에 입원해 있던 시기에 병원의 일상과 의사 선생님들의 모습을 가장 많이 본 듯 하다. 아빠가 있던 병동엔 중증 환자가 많았는데 하긴 대학병원이니 당연한 일인가도 싶고.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폐가 점점 굳어가는 중이고 점점 더 호흡이 어려워 질 거에요. 폐 이식 외에는 아무런 치료약이 없으며 사실상 폐 이식은 아버님 연령에선 시도가 불가능과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정신이 또렷하실 때 연명치료에 대한 상의도 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나 건조할까! 라고 생각했다. 당시 병원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체적으로 친절했으나 죽음을 담담히 알리는 의사 선생님의 어조에 물기라고는 없었다. 의사의 혈관에 흐르는 피의 온도는 보통 사람들보다 낮은 걸까? 그러나 아빠의 투병이 한달 두달 이어지자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치유의 희망을 품고 병원에 오지만 중증환자가 있는 병원의 의사들은 빈번하게 죽음의 안내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심장에는 환자의 사망 선고 반복으로 인해 죽음의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저자 김종관 쌤은 종합병원의 의사로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를 품고 30여년간 쉼 없이 달려 자신의 꿈을 이룬 청년이다. 남들이 볼 적엔 목표한 바를 이룬 성공한 엘리트로 실패 없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랬던 그가 의사로서 처음으로 환자의 몸에 달려있던 ECMO(체외막 산소화 장치)를 꺼야만 했던 날 비로소 삶의 가치와 성공의 의미에 대해 각성을 시작한다. 죽음에서 발견하는 生을 향한 의문과 해답 찾기라니, 이런 아이러니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짊어지고 가야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의사로서 앞만 보고 달리던 스스로를 잠시 멈추기로 한다. 그리고 그 길로 배낭 하나를 꾸려 병원이 아닌 공항으로 발을 돌린다. 1년이라는 시간동안 의사로서가 아니라 인간 안종관으로 세계 곳곳을 두 발로 누빈다. 콜롬비아, 파미르 하이웨이, 이르케슈탐, 훈자 마을, 코카서스, 북유럽, 발칸을 거친 그의 진행형 일시정지는 마침내 중미를 종착지로 삼았고, 이 책은 그 여정의 기록이자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여행의 미덕은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도 이 또한 반드시 지나간다는 것, 때론 그 사건이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점에 깃는다. 사소한 일들이 결정적인 장치가 되어 주기도 하고 부푼 마음을 안고 들른 그 장소에서 기대했던 특별한 광경과 마주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실망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음을 깨닫는 것이 여행이다.

1년이란 시간이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 충분한지는 알 수 없다. 저자는 여행을 마치고 다시 병원으로 복귀해 표면적으로는 여행 전과 다름없이 의사로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일시정지 이전의 그와 일시정지 후의 그가 같은 마음으로 살진 않을 거라 확신한다. 이 책에는 유명한 관광지에 대한 미사여구로 치장한 묘사도 없고 고가의 DSLR로 찍은 풍광 사진 하나 실려있지 않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삶을 하나의 긴 여행으로 본다면 1년쯤 앞만 보며 걷는 일을 나 스스로 멈추었다 해서 그 시간을 낭비라 볼 순 없다. 혹은 물리적인 이유로 인해 도리없이 일시정지를 당했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그 기록이 진솔할수록 마음은 움직인다.

팬데믹으로 인해 세계는 현재 일종의 일시정지 상황에 접어들었다. 우울하고 무력하며 분노와 포기가 쉽게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시정지가 영원히 이어질 리 없다. 다시 세계가 행진을 시작하게 될 때 일시정지 기간동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과정을 꾸렸느냐에 따라 저마다 그 모양새는 달라질 것이다. 자신이 선고한 타인의 죽음 앞에서 내 삶의 일시정지를 택한 저자의 용기와 솔직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므로 그가 권유하는 일시정지를 기쁜 마음으로 수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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