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이별이 드문 일이라 어쩌다 마주한 이별의 온도는 지나치게 뜨거웠다. 뜨겁게 앓으며 무서움에 떨었고 얼굴에 열이 올라 빨갛게 퉁퉁해질 정도로 울었다. 그렇게 뜨겁다 못 해 따갑게 이별을 맞아야만 이별이 건넨 거대한 기운에 잠식당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 이별의 종료는 한 계절의 종식과 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는 일은 결국 거듭되는 이별의 연습인가? 이별 횟수가 늘어간다고 이별이 익숙해 지더냐? 아니... 아니...
하지만 시간과 경험의 축적은 뜨겁게 앓는 방법을 밀어두고 마술사가 손바닥 안으로 쏙쏙 실크스카프를 집어 넣어 하나 둘 셋 짠 사라졌어요 하듯, 슬픔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우게 했다. 서른, 마흔, 쉰, 어른은 말야 엉엉 우는 거 아냐. 더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나이가 된 내가 얼굴을 구기고 울면 사람들은 난감해 해. 당신 나이가 몇갠데 저리 버젓하게 우는고. 내 마음 나이가 저 먼 과거 언젠가 멈춰있다는 말은 차마 털어놓지 못한다.
마침내 우는 법을 잊어, 죽어라 울고싶을 땐 홀로 서성여도 눈물이 안 났다. 꽉꽉 들어찬 슬픔 풀 길 몰라 엄마들은 세제 광고가 완행열차처럼 이어지는 아침드라마를 연대하듯 보는 걸까. 욕하고 화내고 울고... 미상의 의혹들에 너무 쉽게 좌지우지 되는 가짜 사람들을 보면서. 그 분노와 슬픔을 수이 견딜 수 있는 건 인과응보와 해피엔드를 담보하고 있음을 알아서다.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 세상의 법칙에 반하는 이야기들은 죄다 가짜라서 진짜 행복해. 나를 포함해 내 주변에 진짜 그런 인물들은 하나도 없어서 덮어놓고 기뻐하고 안도한다. 뒤를 돌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아침드라마의 미덕을 중년이 되면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어차피 잊혀질 테지만 그래서 감사하다고.
구름을 가장해 걸려있던 화선지색 낮달이 어느새 실종된 아침, 어제는 24절기중 농작물에 흰이슬이 맺힌다는 백로(白露)였다. 계절은 인간의 의지로 속도를 조절해 주진 않을 셈이다. 통째로 사라져버린 지난 봄과 여름에 무심한 계절의 자태가 안타까움이 아닌 고마움으로 다가오는 건 나이를 먹어서일까, 가을을 타기 때문일까. 결국 우린 시간의 힘을 믿는 수밖에 없잖나. 사람의 할 일 이란 게 그런 거여야 하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