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작가는 어떤 이를 비판 할 때 해서는 안되는 일 중 하나는 상대방을 '비판 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일' 이라 했다. 또, 비판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에 비판 당하는 적은 황당한 불쾌감을, 비판하는 자는 얄팍한 우월감을 느끼게 될 뿐 이라고. 신형철의 이 문장에서 비판을 악담으로 바꾸고 싶다. 그 이유는 비판은 종종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지만 악담은 주로 비관적인 병증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누군가가 스스로의 우월감이나 도덕성, 심지어 본인이 장착하고 있는 훌륭한 면모를 입증하려 내가 없는 공간에서 타인에게 나에 대한 험담을 한다면 그건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그리 이용한 그 자의 문제다. 무슨 변명의 여지가 있을까? 물론 그의 발화를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는 청자의 몫이겠지만 건강한 마음과 이성적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면 관계 맺음과 결속을 위해 그러한 저급한 방식을 써선 안된다는 자각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 수 밖엔. 어쩌다 내가 그 사람에게 그런 험한 꼴을 당했을까! 한탄하며 어쩌면 원인이 내게도 있을지 모른다 자책하지는 말자. 그냥 그 사람을 내 삶에서 재빨리 치우고 이걸 기억하기로 한다.
그런 류의 인간이 되지 않겠다는 의지.
별 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된다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우린 어떤 말을 하려 할까? 시인 박준의 말처럼 사람의 입에서 태어나 사람의 귀에서 죽는 말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기도 한다. 비록 초보 작가이지만, 어쨌든 말과 글을 써서 살아가려 마음 먹은 이상, 또 이미 말과 글이 내 삶에 있어 생존의 수단인 사람이라면, 내가 발화하는 말과 글이 타인에게 칼로 박힐지 깃털이 되어 어루만질지 검열해야 함이 맞다. 물론 상황에 따라선 말과 글을 칼로 벼려야 할 때도 있겠으나 그 말과 글이 내게 다시 돌아올 때 칼로 쏜 자에겐 칼로 박히고 깃털로 쏜 자에겐 깃털로 날아오지 않을까. 그것이 말과 글의 힘이라 믿는다. 그러니 칼로 쓰려할 땐 적어도 내게 칼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박준의 문장을 읽으며 내가 쓰려 하는 것이 칼인지 깃털인지 깊이 고민하며 쓰겠다 다짐하는 가을 아침이 조금 서늘해서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