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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Jan 09. 2021

평범한 매일 특별한 순간

오만과 편견


살면서 각질처럼 일어나는 실패나 실수의 상당 부분은 오만과 편견 탓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대상(사건)의 일부만으로 전부를 '미루어' 속단하기 즐겨하고, 또 쉽사리 체념한다. 물론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만과 편견 사이에서 시발점과 종착지를 가늠하지 못한채 어수선하게 우왕좌왕 하다 결국 노선을 이탈하거나 경기 도중에 링 바깥으로 기권이라 쓰인 타올을 던진다. 그리고는 잔머리를 굴린다. 이 상황을 누구의, 무엇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

그 사람은 처음부터 내게 곁을 주지 않았어요, 그 일은 내 적성과 맞지 않다구요, 운이 나빴어요, 저 인간은 성격이 꼬였어요, 어차피 내가 그렇죠 뭐.

그래, 그랬을 가능성도 있겠지.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내가 도중에 멈추고 퇴장해버릴 경우 그 길을 끝까지 갔을 때의 결과치를 절대로 확인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신속한 포기나 쿨한 버림이 합리적인 순간도 있겠으나 마흔 하고도 몇 해를 더 살아보니 빠른 포기가 주는 위안이란 것이 대개는 나만의 정신승리인 경우가 많더라.  

간단하게 말하자면 오만은 건방짐,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의미한다. 건방지다는 말은 비단 표면적으로 드러난 언행에만 해당되는 표현은 아닐테다. 미루어 속단하는 것, 한가지 경우의 수에만 집착하는 것도 실은 (거절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오만과 편견의 영역에 속한다. 즉, 오만과 편견이 초래한 건 여우가 입맛을 다시며 돌아선 포도의 신 맛과 같다.

새해의 출발점에서 우린 서로에게 '꽃길만 걸어요' 라는 덕담을 건넨다. 폭신하고 두터운, 싱싱한 꽃잎이 깔린 보드랍고 향긋한 길만 걸을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에선 울퉁불퉁하고 척박한 길로 걸어가야 하는 때가 월등하게 많아, 어깨를 늘어뜨리고 걷다가 자칫 돌뿌리에 걸려 철푸덕 엎어지는 바람에 고통과 창피함을 이중으로 뒤집어 쓰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과연 길이 거칠고 힘이 들 것 같으니 나아가기를 멈추어야 할까? 꽃길만 걸으라 했던 사람들에게 꽃길이란 것이 대관절 존재하긴 하냐고 씨게 클레임을 해야 할까?

2014년 무렵부터 한동안 나는 무척 아팠다. 아니, 고통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온 몸으로 병증을 견디는 일이야말로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었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일견 꾀병 같았지만 실제로 통각이 민감하게 아우성댔다. 길을 걷다 걸핏하면 실신을 한다거나 빈혈과 현기증, 만성 편두통과 극심한 불면을 달고 살았다. 깨어있는 시간이면 엄습하는 원인 모를 날카로운 통증을 잊으려 술과 안정제, 진통제를 내 멋대로 섞어 마구 삼킨날도 많았다. 위는 운동 하기를 멈추었고 신장의 기능이 허약해 졌으며 한달 내내 하혈을 하거나 극심한 생리통과 PMS, 배란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땐 아무나에게 기대고 싶었고 나를 던지고 싶었다. 로봇이라도 되어 자율적 사고를 정지시킨 후 누군가가 조종해 주길 바랐다. 작은 친절에도 지나치게 감동했고 어떤 이의 악의 섞인 다정함을 구원의 동앗줄마냥 붙들려 했다. 천사와 악마를 가장 많이 만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아찔한 건, 나는 죽. 을. 수. 도. 있었다. 혹은 죽은 상태와 동일한 정도로 망가질 수도 있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고통의 기록은 한결 수월하다. 그저 조금 짜고 쓰고 맵고 아릿한 기억으로 남아 시간이 더 지나면 지금보다도 한결 담담히 되뇌어볼 수 있을 것이다. 삶과 사람을 마주하는 방식에서 오만과 편견을 소거하는 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적잖은 훈련과 성찰이 필요하고, 그러니까 나는, 살아 남았다는 이유로 조금씩 훈련을 하자 마음 먹었다. 물론 지금도 그 훈련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흘렀다. 또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어느덧 통증이 나를 망가뜨리고 말거라는 서글픈 오만과 편견은 세기말적 폐기물이 된 듯도 하다. 참 다행한 일이지만 고통이 선물처럼 고요히 두고 가던 예민한 감수성의 두께마저 옅어졌다. 눈물은 고갈 되었고, 박장대소 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립지 않다. 쓸쓸하지 조차 않다. 그런데 말야, 오늘같은 밤이면 쓸쓸함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심장이 쪼그라들 만큼 곤란해 하던 과거의 내가 약간 부러워. 인간으로 산다는 거 좀 고약한 일인 거 같다.

....... 마흔 일곱의 겨울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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