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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ieun Lewina Oct 26. 2022

레비나의 짧은 소설

소설로  들어간 여자



수요일에 소설로 와요, 기다릴게요.

남자는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여자는 소파에 벌렁 누워 스마트폰 포털 검색창에 ㅅ ㅗ ㅅ ㅓ ㄹ 이라고 차례로 입력해 보았다. 화면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건 절기. 소설은 24절기 중 스무번째 절기로 이 날 첫 얼음이 얼어 소설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는 친절한 설명이 붙어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다음 절기는 대설, 안타깝게도 중설은 없다.
 
여자는 스크롤을 내려 어학사전을 지나 장소로 검색 범위를 특정해 소설이라는 곳이 있는지 찾아본다. 소설 다방, 소설 호프...... 그러다 '호텔 소설'에 손가락이 멈춘다.

호텔 小雪.

첫눈 오는 날 성업할 것만 같은 이름의 호텔이네, 라고 생각하며 여자는 피식 웃는다. 첫눈이 오는데 고작 섹스나 떠올리는 걸 낭만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말이 호텔이지 눈 내리는 풍광을 보며 서로의 온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창문이 있는 곳은 하룻밤에 수십만원을 지불해야하는 오성급 호텔 정도가 아니던가. 게다가 커다란 창문이 있다한들 뱃살과 화장을 지운 얼굴, 옅어져 가는 머리숱을 감추려 전등은 물론이요 커튼이고 뭐고 죄다 내려 구석구석 깜깜하게 할 게 분명하잖아. 그치만 돌아오는 수요일, 여자는 호텔 소설에 가기로 한다. 눈이 내리건 그렇지 않건.

수요일 오후 2시. 호텔 소설에서 남자는 진짜로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뭐랄까 마치 호텔 소설의 일부같아 보였다. 소파 옆에 놓인 빳빳한 잡지나 벽에 걸린 그림처럼. 여자를 발견한 남자는 막 에프터쉐이브 로션을 바르고 나온 듯 싱싱한 얼굴로 왔군요, 라고 여자에게 인사했다.

소설로 오라면서요.

소설은, 벽 한쪽에만 삭막하게 그어진 작고 네모진 창이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대실과 숙박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업소일 거라는 여자의 예상과는 달리 꽤나 번듯한 호텔이었다.

짙은 자주색 커튼이 아치모양으로 좁고 길게 난 창마다 우아한 주름을 그리며 걸려 있었고, 두꺼운 원목을 사용해 손으로 직접 만들었음에 분명한 마호가니 콘솔 위에는 시대를 가늠하기 힘든 도자기 화병에 꽃이, 것도 색색의 생화가 압도적인 스케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런 곳, 그러니까 유명 관광지도 아니고 교통이 편리한 위치도 아닌 장소에 어째서 이런 모습의 호텔이 존재하는 건지 그녀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호텔 소설은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장소임에 분명했다. 어떤 굉장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적요함, 집채만한 해일을 정지 화면으로 보고있는 듯한 기묘한 일렁임이었다. 더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될 것 같은데,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할 것만 같은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머무르자고 내가 나를 붙드는.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더니 스륵 로비 안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실내 온도는 봄날처럼 포근하고 어디선가 맡아본 적인 있는 향인데도 그게 뭔지 죽어도 떠오르지 않는 근사한 향기가 두근두근 떠다니고 있다. 여자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도망가, 여기 더 있으면 안돼. 하지만 이미 알고있다. 남자는 여자를 소설의 더 깊숙한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고 여자는 조금도 거부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이곳에 살아요.

호텔에서 산다니. 남자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엘리베이터에 여자가 오르자 남자는 11이란 숫자를 누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똑같은 모양의 도어가 이어진 복도 끝에 위치한 문을 여니 아주 자그마한 엘리베이터가 하나 더 나타났다. 특정한 장소로 연결된 전용 엘리베이터 같았다.

들어와요.

호텔 소설 현관 앞에서 건물 모양을 좀 더 주의깊게 볼 걸 그랬어. 여자는 후회한다. 대체 12층인지 11층인지 알기 힘든 이 은 건물 어디쯤 붙어있는 걸까. 남자는 소리가 mute된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고요한 미소를 입에 걸고서 탁자 의자를 양 손으로 잡아 뺐다.

이 의자에 앉으라는 뜻일까?

의지를 지배당한 마술사의 조수처럼 여자는 얌전히 그 의자에 앉는다. 신기한 의자다. 분명 나무로 만든 의자일 뿐인데도 완벽하게 안락하다. 훔쳐가고 싶을 정도다. 곧이어 남자가 소중한 이의 뼛가루가 담긴 유골함마냥 조심스레 들고온 티팟에서는 김이 혼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마셔요.

어쩌자고 이런 곳에 온 걸까. 처음 본 남자가 소설로 오라는 한 마디에. 하지만 옅은 오렌지 색이 감도는 티는 향기롭고 맛이 훌륭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이렇게 멋진 티를 마시는 오후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아.

남자는 여전히 음향이 소거된 영화 속 주인공처럼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웃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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